[웨이브파크] 5.

by 서커스

5.

고성 서핑샵에서는 또 자꾸 눈이 마주치던 남자가 마음을 들뜨게 했다. 서핑 수트를 반쯤 내린 몸에 문신이 가득 있었다. 인상이 강한데 눈빛이 착했다. 속초에서 주짓수 도장을 운영하는 마흔네 살 현택이었다. 내가 자꾸 현택을 보니까 현택도 나를 봤다. 그중에 한두 번은 진한 눈맞춤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현택은 바비큐 자리에서 술에 취해 송골매의 '처음 본 순간'을 불렀다. 서핑샵 사장님은 현택이 노래하는 걸 8년 만에 처음 봤다고 했다. 나는 조금 설렜지만 번호를 물어보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 탔다. 그렇지만 버스 안에서 인스타그램으로 현택을 쉽게 찾아냈다. 기자에게 연락처 알아내기는 직업의 일부이기도 하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첫 번째 휴게소에 들르기도 전에 현택의 전화번호를 찾아내 문자를 보냈다.


우리는 서로 아는 것도 없이 괜한 연락을 주고받았다. 현택은 점심시간에 들른 카페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기도, 주말의 파도 차트를 보내주기도 했다. 나는 점심을 먹고 법원으로 돌아오면서 날씨가 좋다며 하늘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주말엔 고성에 가겠다고 했다. 현택은 토요일에 차를 몰고 서울에 갈 일이 있다며 괜찮다면 태워준다고 했다. 나는 주말이 오기만을 참을성 없이 기다리며 그 주를 보냈다.


차에서 우리는 많이 대화하고 웃었다. 고성에 도착해서는 맥주를 마시면서 별을 봤다. 별을 보다가 손을 잡고 머리를 기댔다. 밤에는 그를 보고 싶어 하며 잠이 들었다. 흥분 상태인 데다 다인실 숙소를 쓰다 보니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해 뜨는 걸 보고 있으니 그도 일어나 로비로 나왔다. 우리는 손을 잡고 오래 산책했다. 커피를 마시고 책을 보다가 서핑을 했다. 그가 잡으라고 하는 파도를 잡았다. 바다에 떠서 소나기를 맞으면서 서핑하는 기분이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잘생기고 서핑도 잘하는 현택이 내 파트너였다. 현택이 파도 한 개를 쭉 타고 나를 보면서 다시 라인업으로 돌아오는 게 황홀했다. 현택과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신 뒤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우리는 그다음 주인 추석 연휴에도 고성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때는 다인실이 아니라 별채에서 따로 묵을 거였다. 아침에 현택이 별채를 예약했는데 괜찮으냐고 물었을 때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괜찮은 게 아니라 기대감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우리는 더 깊어진 마음으로 연락을 나눴지만, 현택에게는 어느 저녁 무슨 일이 있었던가 보다. 현택은 그다음 날 연락이 잘 되지 않았고 결국 저녁엔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하는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저혈당이 와서 누워있었고, 나와 보낸 시간이 즐거웠지만 관계를 더 이어갈 자신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황당하고 슬펐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그를 잡을 수도 없었다. 나는 몇 번은 웨이브파크에 혹시 현택이 오지는 않았을까 살폈다. 고성 서핑샵에서 만났던 사람을 웨이브파크에서 마주친 날엔 현택이 내 소식을 들었을까 궁금했다.


현택은 맥없이 끝난 인연이지만 그 덕분에 모든 게 시작됐다. 처음 만난 날 그가 술김에 부른 노래가 송골매의 '처음 본 순간'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 나는 출퇴근 길에 그 노래만을 반복 재생해 들었다. 기자실은 삭막하지만 그걸 들으면 고성 서핑샵 옥상에서 와인에 살짝 취해서 현택을 보던 그 순간에 있을 수 있었다. 주말에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간 단위로 살았다. 재판에 들어가 한 시간 워딩을 치고 나오면 주말까지 한 시간이 덜 남게 되었다. 양재동에 있는 행정법원에서 두 시간 가까이 재판 워딩을 받아치는 일은 평소라면 무척 고된 것이었겠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남은 시간을 두 시간 줄이는 일일 뿐이었다. 재판에서 본 웃긴 순간을 얼른 현택을 만나 말해줘야지 생각도 했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맥없는 마무리가 힘을 쭉 빠지게 하기는 했으나 이 시간에 나는 너무 즐거웠기 때문에 유감이 없다고 생각했다. 현택이 잘 지내고 있을지, 저혈당은 또 오지 않았는지, 서핑을 하고 있는지 자주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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