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브파크] 9.

by 서커스

영찬은 전 여자친구를 따라 웨이브파크에 왔다. 3년을 만나는 동안 여러 번 헤어지고 다시 만났다. 이번에도 헤어지기는 했으나 다시 만나려고 애쓰는 중이다. 전 여자친구 A는 영찬과 헤어지기 한두 달 전부터 서핑에 빠졌다. 회사 동기들과 강원도 고성에서 하는 1박2일 서핑 캠프를 다녀오더니 그다음 주말도, 그다음 주말에도 고성엘 갔다. 영찬은 A가 자신과 있을 때 더 즐겁기를 바랐지만, A는 다른 걸 할 때만 눈이 빛났다. 영찬과 있을 때 눈에 띄게 따분해하는 걸 느꼈다. 영찬은 A가 자고 있을 시간에 술에 취해 전화하고, 서운하다고, 혹시 다른 남자가 생긴 거냐고 물었다. A는 영찬이 술에 취해 전화하는 걸 무척 싫어했다. 그렇지만 불안하고 외로워진 영찬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 또 한 번 술에 취해 전화한 날 A는 끝내 헤어지자고 했다. 지긋지긋하다고, 1초도 더 이런 전화를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A의 말투는 너무 건조하고 차가웠다. 영찬은 몹시 괴로웠다.


A는 영찬과 헤어진 지 며칠 되지 않아 서퍼 남자친구가 생겼다. 7살 어린 남자라고 했다. 영찬은 A의 새 연애를 쿨하게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A는 새로 사귄 남자친구 얘기를 할 때마다 얼굴이 환해졌다. 너무 귀엽다고 했다. 영찬은 슬펐지만 조금만 참으면서 A 옆에 붙어있기로 했다. A가 새 남자친구에게 금방 질릴 거라고 생각해서다. A는 새로운 것에 금방 푹 빠지지만 그만큼 금방 마음을 거두는 편이었다. 7살 어린 그 남자애가 얼마나 잘하든 자신만큼 그녀를 만족시킬 수는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A에게 마음껏 연애해도 상관없으니 친구처럼 가끔 보고 지내자고 했다. 서핑을 배워보기로 한 것도 이 맥락에서였다. A의 애인이 일하고 있는 곳이고 조금도 그 남자를 보고 싶지 않았지만 A와 하루 시간을 보내고 싶어 마음을 냈다.


해무가 짙게 낀 날이었다. 시화호에 조성된 인공섬에 만들어진 웨이브파크에는 해무가 무척 짙게 깔려서 서핑하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흐린 시야에서도 A는 애인을 바로 찾아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아주 잘 타는 숏보더 같았다. 영찬은 애인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상해 커피숍으로 혼자 들어가 버렸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화가 부글부글 끓어 그 자리에 있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초급강습을 예약해두었는데 시간이 좀 남아 커피숍에서 일을 좀 했다. A도 강습을 들었는데 영찬보다 수업이 한 시간 빨리 시작해 먼저 서핑하러 갔다. 카페에 좀 앉아있으니 곧이어 남자 두 명이 들어왔다. 두 명 중에 한 명은 꽤 미남이었다. 나이도 어려 보였다. 영찬은 이 남자가 A의 애인이구나 생각했다. 그 남자는 커피를 시킨 뒤 친구와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볼륨이 아주 큰 것은 아니었지만 커피숍 안이 워낙 조용해서 영찬의 자리에서 목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무엇보다 대화 내용이 너무 거슬려서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야 거기 승무원은 레벨이 다르지. 내가 이번에 일본 다녀오면서 만난 애가 있는데 봐봐. 지난번에 걔보다 훨씬 낫지 않냐? 갔다 와서 한번 봤어"


"솔직히 얌전한 척해도 얘네도 알 거 다 알아. 술 먹으니까 완전 맛 가던데"


영찬은 참담해진다. 3년 동안 쏟은 정성이 있는데, 자신과 헤어지고 고작 저런 한심하고 뻔한 남자를 만나야 했던 걸까. A는 애인이 친구와 저런 대화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 걸까. 쿨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속이 상해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하지만 A에게 이런 얘기는 하지 말아야지. 애인을 괜히 욕한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면 내 꼴이 정말 너무 우스워지지 않나.


일단 강습 시간이 돼 수업 장소에 간다. 첫 수업치고 나쁘지는 않았지만 딱히 재밌지도 않았다. 강사는 눈에 띄게 여자들에게만 친절하게 피드백을 줬다. 운동신경이 있어서 금방 감을 잡을 줄 알았는데 몸이 맘대로 되지도 않았다. 이래저래 화만 나는 하루다. 샤워하고 나와 A와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A는 강사가 별로였다는 영찬의 말을 들으며 속 모르는 소리를 한다.


"오빠, 초급 강습은 우재가 진짜 잘하는데. 다음에 우재가 강습할 때 다시 들어보면 어때?"

"나 걔 누군지 알아. 아까 카페에서 봤어"

"오 진짜? 어떻게 알아봤어?"

"딱 보니 알겠더만. 친구랑 하도 큰소리로 떠들길래"

"그럼 잘못 본 걸 수도 있어. 우재는 시끄러운 스타일은 아닌데"

"아니야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 딱 봐도 걔더만"

"왜? 뭐라고 하는데?"

"됐다. 애인인데 너한테 이런 얘기는 안 할게. 나중에 헤어지면 말해줄게"

"아니 잘못 본 걸 수도 있다니까? 뭐라고 했는데?"

"내 기분도 좀 생각해줘. 말하고 싶지 않다니까"

"아니 그러면 말을 꺼내지 말든가. 뭐 하는 거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얘기 아니야. 뭐 여자 얘기를 했다거나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영찬도 기분이 상하고 A도 기분이 상한다. 시흥 번화가의 한 물갈비 식당에 들어섰는데 A는 말이 없다. 영찬은 사과한다.


"미안해 내가 괜한 얘기를 꺼냈어"

"누굴 잘못 본 건지 모르겠는데, 아마 다른 사람이었을 거야"

"빨간색 코트 입었어. 맞지?"

"아니네. 그거 우재 아니야"

"아 아니야? 얼굴 좀 하얗고"

"응. 절대 아니야. 우재는 엄청 까맣고 코트 안 입었어"

"아…미안해 아 다행이다…뭐 놀러 갔는데 대한항공 승무원이 어쩌고 그러길래 나는 네가 뭐 저런 새끼를 만나나 싶어서…"

"우재는 그런 타입 아니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근데 그런 얘기 들으면서 내 애인이라고 생각했으면 좀 빡치긴 했겠다"


A는 이해해주고 영찬은 고마워한다. 안도한다. A의 애인이 그렇게 한심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은 다행이지만 그래도 아주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다. 둘은 물갈비를 맛있게 먹고 서울로 출발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웨이브파크]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