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여전히 너무 사랑한다는 남자에게 차갑게 '헤어져달라'고 말한 것은 나였지만, 그날 밤 나는 그 남자에게서 사랑받지 못했었다는 생각에 슬퍼서 울었다. 그 남자는 나를 원했고 소유하고 싶어 했지만, 나를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사랑해주지는 않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끼고 챙긴다는 뜻이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어떤 것이 필요하고, 그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를 알아차려야 한다.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을 타고났다면 상대방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좀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타고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게 된다. 그래서 질문하고, 기억하고, 눈치채는 것이 쌓이다 보면 지금 저 사람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어떤 걸 하면 상대가 좋아할지를 점차 알게 된다. 이 과정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이 곧 사랑을 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에 관한 영화와 노래와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이런 것들을 보면서 사랑을 흉내 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꽃과 초콜릿, 맛있는 음식 같은 것들이 사랑을 표시하는 쉬운 재료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우울해 보이는 애인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면서 '아 내가 사랑을 하고 있구나' 생각하기도 쉽다.
그런데 애인이 단지 기분이 좀 안 좋은 게 아니라 생리통에 시달리고 있고, 초콜릿을 먹으면 증상이 더 심해지는 경우라면 이런 상황에서 초콜릿 선물은 사랑이 될 수 없다. 당연히 아직 서로를 잘 몰라서 이런 상황을 알지 못했던 거라면 웃으며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오래 사귄 연인들 사이에서도 사랑의 방식이 어긋나는 상황은 너무나 많다. 그러면 연인들은 뭔가 일이 틀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그게 사랑을 주고받는 아주 기본적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거라고 깨닫지 못한다. 다만 상대를 궁금해하고, 상대에 관한 것을 잘 기억해두는 연인들이라면 이런 문제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해결되기 마련이다.
혼자서도 웬만큼 살아갈 수 있는 어른이라면 언제나 상대방이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딱히 필요한 것이 없고 퇴근 후 애인을 만나 저녁을 먹거나 주말에 영화를 한 편 보는 평범한 일상 외에 그다지 원하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똑같은 식당에서 같은 메뉴를 먹고, 같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더라도 그 날 상대방에게 무얼 물어보고, 어떤 것에 공감하는지에 따라 시간의 무게는 크게 달라진다.
재밌는 것들을 같이 하는 일이 부쩍 줄어들고, 내가 원하지 않을 때 하는 섹스가 늘어난다는 생각이 들 무렵 애인에게 꽃 선물을 해 달라고 했다. 사람들이 왜 꽃 선물을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던 나였지만 그땐 애인에게 꽃다발을 받으면 기분이 참 좋을 것 같았다. 몇 주정도 지나서 그 선물을 받았다. 식탁 위에 간결하게 놓여 있는 꽃 한 송이를 보고 나는 조금 절망을 했다. 내 애인은 꽃 선물을 받고 싶다는 내 말을 '내 앞에 꽃을 하나 가져다 놔줘' 정도로 이해한 것일까. 꽃 선물을 달라고 말하고, 아름다운 꽃다발이 아닌 꽃 한 송이만을 받은 뒤 실망하는 일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 몇 번이 좌절된 뒤에 나는 마음을 접었다. 헤어지자는 내 말에 힘들어하는 남자를 보면서 의아한 기분마저 들었다.
사랑이라는 게 얼마나 귀한 건지 새삼 깨닫는다. 내 지나간 애인은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려주고, 내가 말한 것을 꼼꼼히 기억해주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괜찮은 연인이었다. 같이 있어서 즐거운 때도 많았고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했다. 그럼에도 사랑은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일을 겪은 뒤에 내가 20대에 한 최고의 연애로 꼽는 연애가 바뀌었다. 너무 절절하게 사랑해서 몇 년째 잊지 못하는 드라마틱한 사랑 대신 대학교 2학년 때부터 만나 풋풋한 캠퍼스 커플을 하던 남자가 지나간 사랑 가운데 가장 귀한 사랑으로 기억되게 됐다. 시험기간에 밤을 새우는 나를 위해 새벽에 덮을 것과 먹을 것을 챙겨 도서관으로 와줬던 친구였고, 추운 동아리방에서 잠깐 눈을 붙이는 동안 자기 옷을 덮어줬다. 화이트 초콜릿을 씌운 오레오를 먹어보고 싶다고 했던 걸 기억해 내 생일에 직접 만들어 선물해줬다. 모양이 아주 별로였지만 그런 생각을 해 주는 남자였다. 전주에서인가 사 먹은 빵이 너무 맛있다면서 ktx를 타고 와서 내 입에 넣어줬다. 포장 종이에 기름이 줄줄 새고 눅눅해져서 이게 무슨 맛인가 싶었지만 그런 생각을 해 주는 남자였다.
20대가 다 지나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어 다행이다. 앞으로 누굴 만나면 어떻게 상대를 사랑해줄지, 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어떻게 충분히 귀하게 여길지에 대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