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잘 안 풀렸을 때 누굴 원망하는 건 너무 쉽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당신이 그러지 않아서, 당신이 뭘 잘못해서, 당신이 이만큼 부족해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면 쉽다. 후회를 안 해도 될 것 같아서다. 지난 일을 후회하는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면서 마음만 괴롭게 하므로 후회를 안 할 수 있는 길을 고른다. 원망하기는 내가 자주 하는 생각의 흐름이다.
심지어는 당시에는 별 불만이 없었던 아주 과거의 일까지 들춰내서 서운해하기도 한다. 내가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신이 좀 너무했어.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어.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그때 일이 섭섭하고 억울해.
이런 종류의 원망은 뭘 후회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건 아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당시에 별 유감도 없었는데 새삼 후회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아름답게 기억하던 순간들을 돌연 끄집어내어 회색 물감을 들이붓는 건 어떤 악취미일까. 그대로 두었으면 사는 동안 가끔 그리워하며 고마워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었을 텐데도.
그리운 기억을 굳이 망가뜨릴 때가 있다. 내가 왜 그러는 건지 곰곰 생각을 해 보니 나는 가끔 그리움이 내 발목을 잡는다는 느낌을 받는 것 같다.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자꾸 마음이 과거로만 돌아가는 걸 피하려는 시도다. 살짝 맛본 그 포도가, 지금 생각해보니 시었던 거 같아. 그 맛을 이제는 그리워하지 말아야지. 지금 먹는 포도는 참 맛있네, 하면서. 아니면 앞으로 정말 달디단 포도를 찾아봐야지, 하면서. 그런데 내가 이렇게 무정한 사람이었나 새삼 낯설어진다. 그리움은 따뜻하고 인간적이고 어쩔 땐 낭만적인 기분인데.
또 가끔은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탓할 게 없을 때 굳이 과거의 기억까지 소환해 적극적으로 탓하기도 한다. 단지 내 마음이 변해서 당신이 싫어졌을 뿐인데, 내 탓을 하기가 싫어서 그때 당신이 이런 실수를 했다고 원망하는 것이다. 당신이 상처 받을 것이 미안한데, 미안함을 감당하기가 싫어서 당신이 초래한 일이라고 떠넘겨버린다. 아주 미숙한 반응이다.
또 한편으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분별력이 생기고 상황을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되어 과거의 일을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때는 어떤 것에 도취되어 분간을 못했던 것을 비로소 차분한 마음으로 보게 되었을 수 있다. 그리워할 이유가 없었던 것을 괜히 그리워한 것이어서, 이제 괜한 일은 그만하자 하고 스스로 납득시키는 작업이다. 이런 생각조차도 시간이 더 흐르면 또 다른 이유로 모자란 것이 될 수 있지만, 어쨌든 성숙해가면서 옛날 일에 대한 해석이 바뀌기도 한다.
되게 사랑했던 사람을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났다. 옛날처럼 행복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바람에 사랑을 이어가지 못했을 뿐 뭉근한 마음은 아주 오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식어 있었다. 나는 내 마음이 이렇게 변한 게 슬퍼서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 잿빛을 끼얹었다. 아끼던 기억이 잿빛이 되었다는 이유로 또다시 슬퍼했다. 슬퍼지려 애쓰는 사람처럼 굴었다. 내가 왜 이러나 싶어 몹시 혼란했다.
나중에라도 내가 왜 그랬는지 확실히 알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종류의 물음은 언제나 머릿속에 물음표를 달고 다니게 만들지만, 결코 딱 떨어지는 답이 있지는 않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목적인 물음들이다. 또 불확실한 모든 것들 중에서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구분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내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이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이었다. 새로운 관계들도 끝나는 마당에, 옛 연인이 찾아오는 바람에 난데없이 이별을 여러 개 겪게 됐다. 마음을 남김없이 비워내는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