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김춘수 시인의 <꽃을 위한 서시>다. 학창시절 그리고 대학에서까지도 근현대 시를 공부했으면서도 여전히 어려운 건 시라서, 전체 의미는 명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시의 화자인 '나'는 혼돈 상태에 교착되어 있음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현재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예민하고 태만한 상태다. 입에서 쏟아내는 말들은 교묘하게 돌렸지만 누군가를 헐뜯으려는 뉘앙스고, 텍스트도 읽으려고 하지 않고, 당이 가득한 해로운 인공식품을 몸에 넣으려고 한다. 사소한 것에 신경이 긁히고 단맛 가득한 걸로 안도하려는 이 상태, 위험한 짐승 상태다. 필사적으로 날카로운 발톱을 감추려고 애를 쓰며 안정적이고 나이스한 사람임을 가장한다. 이렇게 애를 쓰는 일도 힘들테지.
메타인지력을 가동해 안정된 상태로 스스로를 데려가려는 마음은 가득하다. 내가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따듯하고 평화로운 곳에 가서 다독이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고 말이다. 충족의 부재, 갈증 그로 인한 불안 등이 복합적으로 지금을 만들고 있는 것임을 알지만.
시에서 '나'는 '너'를 간절히 원하지만 닿으면 ‘미지의 어둠’으로 만들어 버리고, 닿지 않으면 ‘너’는 이름조차 갖지 못한 채 소멸해 버린다. 서로가 닿아야만, 합일 되어야만 의미가 만들어 진다. 너도, 나도. 그러나 지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 그럼, 울 수밖에. 엉엉엉엉. 아, 어쩌란 말이냐. 그러나 그 울음은 신세 한탄이나 체념이 아니다. 다시금 내부에 힘을 모으고 다지는 울음. 그게 돌개바람이 되어 금이 되어 본다. 그럼,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를 부르고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그 신부를 만나기 위해서는 ‘위험한 짐승’에서 벗어난 정화된 상태여야 하며, 이제서야 만남을 위한 부름이 시작된 것이다. 부르면 신부가 얼굴을 보여줄 일이다.
위험한 짐승을 벗어나 누군가를 불러 만나는 일은 각자에게 달렸다. 나의 짐승을 길들여 평온으로 가게 하는 것의 묘안도 내게 있을 것이다. 터널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일이 그리 어렵진 않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