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너의 결혼식

공포회피형 남자와의 연애 10 - 진짜 끝

by 단비



드디어 한참 묵혀두었던 공포회피형 남자와의 연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나는 이 이별 후 괜찮아지기까지 딱 1년이 걸렸다.

정확히는 마음의 평안을 찾는 데까지 1년이었으며, 그 사람을 완전히 지우는 데에는 반년이 더 걸렸다.


처음 6개월간은 우연으로라도 딱 한 번만 마주쳤으면 좋겠다고 매일같이 생각했고,

그 이후 6개월은 오히려 이대로 쭉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루에 몇 번 문득문득 생각나던 6개월...


부정적인 생각만 하게 만들던 그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고, 바닥을 쳤던 내 자존감도 점점 회복할 수 있었다.

사람은 역시 주변에 어떤 사람을 두느냐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도 새삼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도, 강력한 부정 에너지를 매일 가까이하게 되면 함께 물들어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미 쏟아진 먹물에 하얀 도화지로 덮어봤자 도화지까지 새까맣게 물들어버리는 것과도 같았다.


혹시나 그래도 난 잘 이겨낼 것 같은데?라는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장 종이비행기로 접어 던져버렸으면 좋겠다.

나도 웬만하면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자신 있게 그 관계를 지속했다가 너무 커다란 아픔만 남긴 채 끝난 사람이니까.



다시 원래의 평범했던 나를 되찾는 과정은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끔찍할 만큼 아프고 힘들었다.


과장이 아니라 진심으로 ‘차라리 죽어서 지옥에 있는 게 이것보단 덜 괴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매일같이 했을 정도이다.



*

그렇게 끔찍하게도 힘든 1년이 지난 후, 드디어 나는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정말 그가 눈앞에 나타나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1년 만에 그의 소식을 전달해 준 것은 다름 아닌 그와 나를 소개해 주셨던 분들이셨다.

우리 회사 근처에 올 일이 있는데 다른 분들과 다 같이 회식 한 번 하지 않겠냐는 말에 나는 좋다고 했다.



“ㅇㅇ이 소식 들으셨어요?”

“에이, 말하지 마. ㅇㅇ씨 충격받으셔.”



다른 사람들이 화장실을 가거나, 담배를 피우러 간 사이 그 두 분과 나만 남았을 때 나온 대화였다.

충격이라니. 뭐지?

그가 나쁜 생각이라도 했나? 맨날 회사에 불 지르고 싶다더니 진짜 불이라도 질러서 회사에서 잘렸나? 아니면 혹시... 죽... 었나?


그렇게 나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었고 그들은 계속, ‘이제 괜찮으신 것 같은데 말해주자.’ ‘그래도 이건 꽤나 충격이실 거다.’로 팽팽하게 다투고 계셨다.


“그냥 말해 주세요. 저 이제 진짜 무슨 말을 들어도 충격 안 받아요!”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내가 알려달라고 졸라 그들의 다툼을 끝낼 수 있었다.



“ㅇㅇ이... 곧 결혼해.”

“???”

“만난 지 2개월 만에 결혼한다더라. 그렇게 예전부터 빨리 결혼을 하고 싶어 하더니.”

“???”


오... 이건 다른 의미로 충격인 내용이었다.



나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아 결혼은 조금 늦게 하고 싶다는 말을 종종 했었는데 그런 대화를 하고 난 후면 항상 연락이 뜸해지고, 우리는 안 맞는 것 같다며 나에게 거리를 두던 그의 모습이 오랜만에 다시금 생각이 났다.

정말 화가 나서 한 번은 도망가려는 그를 붙잡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항상 남들에 비해 뒤처지는 기분이 싫다고 했다.

남들처럼 이 나이엔 직장을 얻고, 이 나이엔 결혼을 하는 게 당연하다며, 주변의 선배들이 결혼할 때마다 본인은 조급해 죽겠다고 나에게 크게 화를 냈었다.

때문에 그는 어디서 뭘 하든 가장 잘하는 엘리트로 소문나 있었으며 평판 또한 누구보다 좋았다.


본인의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

결혼 이야기는 내가 그와의 이별을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나에게 결혼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 둘이 만나서 서로를 충분히 알아가는 시간을 겪은 후,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이 사람이랑은 결혼해도 되겠다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 충분히 생겼을 때 하는 것이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해도 힘들 결혼 생활을 고작 조건과 시기만 보고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결혼은 그저 남들에게 뒤처져 보이지 않기 위해, 무조건 나이가 차기 전에 해치우고 말아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요즘은 결혼이 필수가 아닌 시대임에도 말이다.



그렇게 남들 다 한다고 조급해져서 나도 덩달아 그나마 조건 맞는 사람 골라서 결혼하면 그게 정말 행복한가?

그게 진짜 본인의 미래를 위한 일인가?

그게 정말 결혼을 안 했을 때보다 행복한 인생이고, 정말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은 인생인가?


너는 결국 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선택에서조차 본인의 행복이 아닌 남들 눈에 비치는 모습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결정하는 사람이구나.

네 말대로 우리의 가치관은 정말 말도 안 되게 달랐구나.



너를 사랑하는 시간이 지나고, 혼자 아파하고 그리워하던 시간까지 다 지나고 나니 드디어 내 눈을 가리고 있던 먹물들이 걷혔다.

아니 먹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이 정도쯤이야 극복할 수 있다며 흐린 눈을 하며 내가 스스로 외면했던 현실들이었다.



너는 항상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심지어 그때의 네 나이는 고작 20대 중반이었는데.



너의 결혼 소식에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덤덤했다.

아니 오히려 상대 여자 쪽이 먼저 걱정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스스로도 신기했다.

그동안 혼자 너무 많이 아팠던 시간들을 지나왔기 때문인가 보다.



*

“저는 얘가 왜 ㅇㅇ씨와 헤어졌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니까요? 두 분 다 성격도 참 좋고 잘 어울렸는데 말이에요.”


아마 그와 평생 깊은 관계 따윈 맺을 일 없이 거리감 있는 관계만을 유지하며 지내실 이 분들은 그의 진짜 모습을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이별 사유도 평생 모르시겠지.




*

지금의 나는 이제 네가 전혀 생각나지 않게 되었다.

너무 오래 그리워하고 아파했던 탓인지, 더 이상 그리움과 미련 등을 포함한 그 어떤 감정조차 한 톨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아주 사소한 걸로도 행복할 수 있었던 원래의 나로 완전히 돌아왔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모르는 지금의 너는 꼭 행복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이건 더 이상 사랑도 미련도 아닌,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안쓰러움을 담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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