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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Mar 24. 2024

사랑하는 사람이 나 없이도 행복할 때

공포회피형 남자와의 연애 9


전화로 헤어지자고 말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별은 만나서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생각하고 살았던 나는, 그날 그와 전화를 하던 중, 시간 되는 날 한 번 만나서 얼굴 보고 제대로 마무리하자고 말했다.



그렇게 다음 만남을 기다리는 동안, 내 마음은 생각보다 너무나도 가벼웠다.


이별을 통보하는 사람은 이렇게나 마음이 가볍구나.

그래서 넌 매번 네 마음의 짐이 감당되지 않을 때마다 네 무겁고 어려운 감정들을 이별이란 말에 담아 나에게 팽개치듯 던져주고는 도망쳐 버렸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음에도 나는 그가 밉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는 그를 걱정했다.

너는 평소에 얼마나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살고 있길래 남들의 입장은 생각도 못해보고 본인의 불행에만 갇혀 살아가는 걸까.



*

일주일 뒤, 그의 동네에서 우리는 제대로 된 이별을 하기 위해 만났다.

처음으로 내가 먼저 말한 이별은 생각보다 마음이 편안했으며 나는 너무나 담담했다.


“여기 너무 시끄럽네... 우리 2차로 조용한 곳에서 술이나 커피 마시면서 조용히 이야기 나누자.”

“그래 그러자. “


그날 우리는 직원분이 고기를 구워주며 던지는 농담에도 웃으며 받아칠 정도로 평범한 커플 같은 식사를 마쳤다.


꽤나 화기애애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어디로 갈지 정하며 잠시 걷고 있던 찰나에, 예정에 없던 소나기가 내렸다.


“우리 집이 가까우니까 일단 우리 집으로 갈까? 옷도 많이 젖어서 가게에 들어가기도 좀 그렇잖아.”

그의 제안에 조금 고민했지만, 이미 비를 너무 많이 맞았기 때문에 이 꼴로 다른 가게에 들어가는 것도 민폐인 것 같아 그러자고 했다.


따뜻하지만 조금 쌀쌀한 봄날,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그의 겉옷을 그와 내 머리 위로 같이 덮어쓰고는 소중하게 나를 감싸고 함께 그의 집으로 가는 장면은, 우리가 이별하는 날이 아니었다면 비 오는 날마다 그날 생각나냐며 함께 웃으며 회상할 로맨틱한 추억의 한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온통 ‘헤어지려고 만난 날 같이 집으로 가게 될 줄이야.’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어이없고 웃기기만 했다.



그렇게 그의 집에서 대충 옷을 말려놓고 편한 옷을 빌려 입은 나에게 그가 캔맥주를 꺼내오며 마실래?라고 물었다.


“음, 아니 난 괜찮아.”


그렇게 그는 맥주를 마시며 한참 아무렇지 않게 또 일상적인 이야기를 이어갔다.



‘... 뭐야, 얜 나랑 헤어졌다고 생각한 게 맞는 건가.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나를 집에 들이고, 또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평소처럼 이야기를 하는 거지? 우린 오늘 이러려고 만난 게 아닌데...’


결국 또 답답함을 참다못한 내가 먼저 헤어지는 김에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을 제일 먼저 뱉었다.


“넌 나랑 왜 헤어지는 게 맞다고 생각한 거야?”


그가 나에게 우린 안 맞다고 할 때마다, 헤어지는 게 맞다고 말할 때마다 이유를 몰라 매번 지옥같이 힘들던 마음은 해소하고 헤어지고 싶었다.

이제 헤어진 마당에 네가 또다시 잠수 탈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이렇게 대놓고 물을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한참 또 아무 말 없이 있다가 나지막이 한마디를 뱉었다.


“집에 가.”

“? 아직 비 안 그쳤어. 조금 이따 그친대. 그리고 우리 대화는 마무리하고 가야지. 그러려고 만난 거잖아 오늘.”

“난 할 말 없어. 네가 만나자고 해서 만난 거잖아. 나 지금 혼자 있고 싶으니까 제발 집에 가.”


신박하다 신박해. 본인의 집이라 본인이 도망칠 곳이 없으니 이젠 나를 집에서 쫓아내는 기술을 선보였다.



“나 지금까지 네가 그렇게 대화를 피할 때마다 너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는데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어. 네가 이렇게 또 도망치고 헤어지자고 해버릴까 봐. 근데 오늘은 마지막으로 그런 이야기하려고 만난 거잖아. 오늘까지 대화를 피해버리면 도대체 나는 언제 이유를 알 수 있어? 왜 매번 나만 내 마음을 다 이야기하고 너는 나한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아? “

“난 오늘 그런 이야기를 할 줄 알았으면 너랑 안 만났을 거야. 그런 거면 난 너랑 할 이야기 없어. ”

“그럼 왜 만난 건데? 그렇게 계속 네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대화를 회피하고 도망치면 남겨진 상대 입장은 생각해 봤어? 상대 입장에서는 네가 말해주지 않은 이유 하나 때문에 수십수백만 가지 이유를 혼자 생각해 보고 자책해야 해. “

“원래 생각은 혼자 하는 거야! 어떻게 그런 걸 하나하나 다 말을 해?”

“아니 말을 안 하면 어떻게 알아...”

“말을 안 해도 알아야지. 이래서 너랑 내가 안 맞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헤어지는 게 맞는 거고.”


이 맥락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지금 정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건가? 아니 나는 지금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랑 대화를 하는 게 맞는 건가? 아니지, 지금 내가 이상한 건가? 일단 지금 얘 입장에선 내가 이상한 사람인 게 맞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난 오늘 가기 전에 이유는 알고 가야겠어. 안 그러면 내 마음이 계속 답답하고 불편해서 못 참을 것 같아.”

“제발 집에 좀 가. 혼자 있고 싶다고 하면 혼자 두는 게 맞는 거야.”


베란다에 말리고 있던 내 옷을 가져와 던지듯 나에게 주며 제발 집에 좀 가라는 그를 보며 나는 마지막까지 마음이 찢어지게도 아팠다.



그날 우린 전혀 대화라는 게 통하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다고 하면 혼자 두는 게 맞다고? 넌 평소에 이렇게 생각하며 나를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사람도 이해 못 하는 멍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네가 안 갈 거면 내가 본가로 갈게. 넌 여기 있어.”

“...”


그는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는지 내가 계속 안 가고 버티고 있으니 이젠 본인이 나가겠다며 자리를 일어났다.


아니 이게 뭐야...? 좀 전까지 나를 다정하게 옷까지 나눠씌워주며 집에 데리고 온 사람과 같은 사람이 맞는 거야?

100일을 넘게 만나면서 나는 여전히도 그렇게 순식간에 변해버리는 그의 갭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걸 이해가 가능한 사람이 존재하긴 한 걸까.


“앉아 봐. 난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제발 대화 좀 해.”

“난 대화 좀 하자는 말이 너무 싫어! 제발 나 좀 혼자 있게 내버려두어!!”

“그렇게 아무 대화도 안 할 거면 연애는 왜 해? 친구는 어떻게 만나? 대화를 해야 서로 마음을 알 거 아냐! “

“친구도 안 사귀고 연애도 안 할 테니까 제발 좀 놔!! “


얘랑은 정말 정상적인 문제 해결이란 전혀 할 수가 없구나.

아니 조금이라도 불편한 이야기로는 정상적인 의사소통조차 할 수가 없구나.

이미 그걸 알고있었기에 헤어짐을 결심하긴 했지만, 막상 이날 이렇게 화내면서까지 도망치려 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헤어짐을 결심하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한가득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랑 계속 만나고 대화를 시도하다 보면 네가 조금씩 변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여전히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더 이상 너를 잡을 수 없었다.

이렇게 너를 잡을 때마다 나는 나를 하나씩 놓아야 했고, 내가 살아오며 바르게 배우고 쌓아왔다고 생각한 가치관들을 하나씩 지워버리고 외면해야 했으니까.


“그래 알겠어. 내가 집에 갈게. 넌 여기 있어. 오늘 나오기 싫었을 텐데 나와줘서 고마웠어. “

“...”

“밥 잘 챙겨 먹고, 꼭 잘 지내. 난 네가 정말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이건 진심이야. “



난 너랑 너무나도 헤어지기 싫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헤어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사랑하는 네 옆에 있으면서 점점 빛을 잃어가는 나에게 미안해서 나는 결국 정말 사랑하던 너를 내 손으로 놓았다.



*

그날 이후, 우리는 한 번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멀지 않은 동네였음에도, 심지어는 서로의 많은 동선과 인물들이 겹쳤음에도.


모든 인연의 길이는 정해져 있다고 했다.

인연을 다한 사이는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면서라도 만나지지 않는다고.

우리의 인연은 너무 강렬하게 짧고 굵어서 이렇게 빨리 불타 없어져버렸나 보다.

그때의 나는 저 말을 부정했고 우린 언젠간 다시 마주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는 너랑 한 번이라도 마주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막상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마주쳤다면, 그래서 내가 네 얼굴을 봐버렸다면 나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을 테니까.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나는 너와의 이별을 결심해서 다행이었다.

이 연애가 더 길어져 내 세상에 더 이상 나라는 존재는 남아있지 않고 너로 가득 채워져 버려서 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되었다면, 나는 아무리 죽을 만큼 힘들어도 너를 놓지 못했을 것이다. 매 순간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난도질당해도 나는 너를 꼭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잡고 있는 것이 이미 손도 못 쓸 정도로 썩어버린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나는 그와 헤어지고 6개월은 지옥같이 힘들었고, 그 이후로도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파서 억지로 지워버리려고 노력하는 시간들을 보냈다.

너랑 만난 건 고작 100일 남짓인데 이별의 아픔은 1년이 넘게 남아있었다.




너에게 나는 어떤 기억일까.

문득 떠오르면 그리워지는 좋은 기억일까, 아니면 지워버리고 싶은 나쁜 기억일까.

내가 힘들었던 만큼, 아니 넌 나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랫동안 힘들고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안 그래도 생각이 많고 우울에 쉽게 빠져드는 너에게 이런 말은 너무 잔인한 말인 것 같아 나는 그 생각들을 얼른 지워버리곤 했다.

마지막에 내가 너에게 했던 말처럼, 나는 네가 정말 행복해졌으면 좋겠으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도 상대의 행복을 빌어주는 건 상대를 덜 사랑해서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은 완전히 틀렸었다.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하지만 내가 없어도 꼭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니까.


대신 언젠가 네가 나 없이도 행복하게 잘 지낸다는 소식이 들려온다면, 그건 내 마음이 너로 인해 전혀 아프지 않을 때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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