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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Mar 20. 2024

처음으로 내가 먼저 말한 이별

공포회피형 남자와의 연애 8


너와 헤어지기 싫어서 매 순간 고민했던 나는, 언제부터인지 헤어지는 게 맞는 걸까를 먼저 고민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지금껏 그와 헤어지기 싫어서 흐린 눈으로 모른 척 넘어갔던 모든 것들과 드디어 마주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상처받아도 다시 금방 회복할 거라고 굳게 믿고 살았기 때문에 힘든 상황을 피하기보단 빠르게 해결하고 치워버리는 쪽에 더 가까웠는데, 고작 너와의 이별이 무서워서 그동안 너무 많은 상황과 감정들을 회피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감정들과 상황들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커져있었다.



그렇게 마주한 너와의 미래 속 내 모습은 하나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불행할 장면만 한가득 그려졌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면서도 네가 너무 좋아 외면했었는데,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이미 너와 만나며 내 존재는 부정적이고 불안한 감정들에 잠식된 채 지하 끝까지 내려가다 못해, 차갑고 어두운 심해를 잔뜩 헤매고 있었고 너와의 미래를 그려봤을 때 나의 모습은 매순간 네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지옥을 헤매는 모습만 그려졌으니까.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너를 쉽게 놓을 수 없었다.

너도 나에게 그날 이런 마음으로 ‘우린 너무 달라서 헤어지는 게 맞는데, 네가 너무 좋아서 헤어지기 힘들어서 고민하고 있었어.’라는 말을 뱉었던 거였구나.



지금보다 더한 지옥 속에서 살아갈 미래의 내가 너무나 불쌍해 보여, 나는 이별을 결심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몇 시간 뒤면 그 결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를 놓지 못할 이유로 가득 채워버렸다.



너와 계속 함께하면 불행할 미래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노력하면 행복한 날들도 많지 않을까.

요즘 내 행복의 지분 99%가 너인데, 그런 네가 없어지고 나면 나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행복까지 가기도 전에, 내가 너 없이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다른 누군가를 너만큼이나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모든 질문에 당당하게 YES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난 너 없이 행복할 자신이 없다.

너와 만나며 힘들었던 시간들만큼이나, 너와 만나면서 느꼈던 행복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컸으니까.




차라리 그날 만나지 말았더라면.

그날 내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너의 입에서 이별을 고민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했어야 했었나.

말의 힘은 너무나 강해서 원래 생각만 하던 것을 말로 뱉으면 그 생각은 더 이상 생각이 아닌 확신이 되어 버리니까.

혹시 너의 생각 속에만 있던 말을 내가 확신으로 만들어버리진 않았을까.



나는 아직 너와 헤어질 자신이 없었다.




*

너는 또다시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했고, 나는 여전히 너의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미 이 관계에서 너는 철저한 갑이었고, 나는 바닥 끝까지 내려간 을이었다.



그런 데이트를 몇 번 이어간 후, 나는 드디어 이별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내 자존감이 돌아오지 않는 이상, 나는 이 연애에서 더 이상 행복이란 것은 찾을 수 없겠다.

그동안 내가 너의 사랑에 행복했던 것은, 내 긍정적임과 자존감이 단단하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너의 사랑을 사랑으로만 받아들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는 더 이상 네 사랑을 온전히 사랑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네가 나에게 주는 사랑에는 오직 사랑만 들어있는 게 아닌, 너의 내면에 있는 불안함과 고민, 걱정, 그리고 열등감, 자격지심 등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들도 함께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버렸으니까.


그런 네 모습이 싫었던 게 아니라, 그런 너로 인해 나까지 부정적인 에너지로 가득한 사람으로 변한 것이 문제였다.

사실 나는 그런 네 모습조차도 사랑했다.

그래서 고통스러울 이별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계속 회피했다.


하지만 헤어져야 한다.

너와의 관계를 끝내야지만 나는 이 숨 막히는 지옥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날 밤, 결심을 마친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별은 만나서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는 또 나를 만나지 않으려 했으므로 나는 전화로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 너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듣다가, 정적을 맞이했을 때 나는 인생에서 제일 힘든 말을 뱉었다.


“우리 그만 만날까.”


그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오래 정적을 유지하는 것은 처음 봤다.

보통은 재빠르게 회피해 버리거나, 아니면 그전에 내가 먼저 그 정적을 깨버렸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도 다음에 이야기하자는 말을 뱉고는 도망가지 않았고, 나도 먼저 정적을 깨지 않았다.


세 시간 같은 3분이 흘렀다. 기다리는 3분 동안 나는 그가 전화를 끊은 건가 몇 번이나 확인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입을 뗐다.


“......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

그는 나를 이번에도 쉽게 놓았다.

만약 그는 나와 헤어지기 싫은 마음이 더 컸어도, 나를 잡을 수 있는 용기는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뱉는 순간 이 관계는 정말 되돌릴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목 끝까지 올라온 헤어지자는 말을 삼키고 삼켰던 이유이기도 하다.

때문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너를 다시는 못 볼 각오로, 살면서 그 어떤 중요한 상황보다 가장 큰 결심을 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이 관계는 지금까지 나 혼자서 안간힘을 써가며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도 같았다.


마음 아프지만 나는 혼자서 애써 지켜가던 이 관계를 드디어 놓았다.

내가 이 사랑을 유지하는 데에 얼마나 애썼는지 너는 아마 평생 모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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