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의악에서 넘어진 이후 나는 홀로 있는 숲에서 사고가 나면 정말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삼의악에 혼자 들어가는 것을 멈췄다. 대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제주시 아라일동 산 37-1>에 있는 소산오름으로 갔다.
이 소산오름은 예전에 산신제를 지냈었던 오름이기도 하고, 고려 예종 때 송나라 호종단이 제주에 와서 명산의 모든 혈(穴)을 질러버리고 떠나던 날 갑자기 솟아나 한라산의 맥이 다 죽지 않았음을 과시했다는 전설도 있는 오름으로, 뭔가 알 수 없는 특별한 기운이 가득 찬 곳이다. 참고로 이 오름의 이름인 ‘소산’은 솟았다는 의미이다.
이곳에 가면 나는 항상 포근하고 편안함을 느꼈다. 나는 여기가 마이클 A. 싱어의 『될 일은 된다』의 한 구절에 나오는 곳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책에는 마이클 싱어가 세상만사로부터 떨어진 고립된 장소를 찾다가 한적한 땅을 발견하고 그곳에 오두막을 짓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부드러운 능선의 언덕을 올라가 부지의 북쪽 경계를 이루고 있는 울타리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목초지가 야트막한 내리막 경사를 그리며 펼쳐져 있었고 그 끝에는 일렬로 늘어선 나무를 따라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땅의 북쪽 면 전체가 이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풍경을 굽어 보고 있었다. (...) 숲은 고요하고 아늑했다. 마치 자궁 속에 있는 것 같았다. (...) 그리고 돌아온 순간, 나는 내가 드디어 집을 찾았음을 깨달았다.
-마이클 A. 싱어 『될 일은 된다』, p.73.」
'이곳이 꼭 책에 나온 그곳 같잖아.'
나는 마이클 싱어의 책을 읽다가 문득 나도 작은 숲을 갖게 되면 참 좋겠다는 상상에 빠진 적이 있는데, 마침내 정원과 같은 이 작은 편백숲을 발견해서 기뻤다. 소산오름은 편백의 향이 가득하고, 바닥에는 까만 제주 흙으로 덮여 있는 아늑한 곳이다. 나는 이곳의 느낌이 좋아 매일 찾아갔고, 이 숲이 주는 편안함 덕분에 다녀오면 늘 기분이 좋았다.
아마 내가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 숲 앞에는 안내도와 함께 <편백나무 숲, 피톤치드의 효능>이라는 안내판이 있는 데 그냥 읽기만 해도 몸이 절로 건강해지는 느낌이 든다.
「편백나무는 측백나무과이며, 우리 몸에 이로운 치유 물질 피톤치드를 침엽수 중에서 가장 많이 방출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 '피톤치드'는 나무나 식물이 내뿜는 성분으로 해충이나 벌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 우리가 산림욕을 하게 되면 기분도 상쾌해지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데, 이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피톤치드다. 피톤치드에는 항균효과, 스트레스완화, 신체진정작용, 면역력 강화와 같은 효능이 있으며, 오전 10시 ~ 2시 사이에 가장 많은 양이 나온다고 알려져 있다.」
피톤치드를 맡기 위해서는 피톤치드가 많이 나오는 시간을 맞춰서 가면 좋았겠지만, 일정이 늘 그렇게 맞지는 않았다. 나는 피톤치드와 상관없이 아무 때나 이 숲을 찾았다. 아무 때나 가도 이 숲은 늘 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알게 된 사실은 사람들은 오전 9시경이 되면 한 둘씩 들어오고, 오후 4시~5시가 되면 모두 다 가버린다는 것이었다. 겨울이 되면 오후 4시경 이 숲에는 아무도 없어서 좀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은 사람이 없을 것 같았지만, 오전 9시에서 오후 2시 사이에는 비가 와도 한 두 사람은 계속 이곳을 찾아왔다.
이 숲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뒤 이 숲의 가장 예쁜 시기는 편백잎이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가을이라는 것을 알았다. 편백잎이 온 산을 황금빛으로 덮어 버리면 내 마음속 잃어버렸던 풍요로움과 영감도 함께 폭발하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셔터를 눌러보았지만, 직접 느끼는 편백잎의 색감과 바닥에 밟히는 낙엽의 생생함은 작은 사진에 모두 담기지 않아 아쉬움만 남겼다.
처음 갔을 때, 많은 사람이 맨발로 길을 걷고 있는 게 보였지만, 나는 선뜻 맨발로 걷진 못했다. 왠지 좀 창피하기도 하고, 내 나이에 맨발로 걷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 특히 맨발로 걸으면 발을 다 버리는 데, 그 뒤처리가 너무 귀찮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리 몸에는 30∼60mV의 양전하가 흐르는 데, 맨발 걷기를 하며 발과 땅과 만나는 순간 0V가 된다.'는 기사를 봤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나는 흥미가 돋아 관련 기사를 천천히 읽어 보았다.
「우리 몸은 원래 활성산소가 있는데, 이 활성산소의 역할은 몸의 곪거나 상처 난 곳을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몸이 다 치유되고 나면 활성산소가 몸 밖으로 배출돼야 하는데, 몸속 양전하 때문에 배출되지 못하고 몸속을 돌아다니다가 멀쩡한 세포를 공격해 몸에 병이 나는 것이라고 했다. 맨발 걷기를 하기 위해 땅과 접지(earthing)하는 순간 몸이 0V가 되면서 활성산소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한다.」
'아, 이 무슨 참신한 이야기인가?'
나는 살짝 호기심이 동했다.
그러다 같은 날 요가에 갔는데, 웬일인지 잘 되던 동작도 안 되고, 그날따라 낑낑거리게 됐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은 뻣뻣해진 내 몸을 보다 못해, 나를 엎드리게 한 뒤 발을 밟아 주셨다.
"아!"
아픔에 괴성을 지르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용희 씨, 발바닥이 엄청나게 뭉쳤네요."
나는 발바닥에 근육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지만, 그게 뭉칠 수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다.
'오늘따라 이런 일이 계속 생기는 게 혹시 나에게 소산오름에서 맨발로 걸으라는 신호 아닌가? 사람들도 많이 걷는 데, 내일은 나도 한 번 걸어봐야지.'
그렇게 결심하고, 다음 날부터 나는 소산오름을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흙의 감촉은 그야말로 황홀했다. 공중에 둥둥 부유하던 내 몸에 새로 두꺼운 뿌리가 돋아나는 것 같았다.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면 인간은 불안정해지고, 어떻게든 두 발을 땅에 오롯이 붙이고 서 있을 때, 더 강인한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려면 흙을 밟아야 하는 거였다.
나는 왜 그동안 흙이 주는 에너지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흙을 밟으면 밟을수록 내 몸이 더 건강해지고 깨어나고 있다는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이곳을 온전히 느끼고 싶은 마음에 핸드폰도 하지 않고, 늘 혼자 조용히 몸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에 맨발로 걷는 것은 무척이나 아팠다. 삼의악에서는 만 보를 걸어도 지치지 않던 나였는데, 소산오름에서는 맨발로 이천 보 정도 걸으면 쉬어야 했다.
‘이렇게 나약한 나인데, 신발 신었다고 너무 자만하면서 산을 오르내렸군. 앞으로는 절대 자만하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맨발 걷기를 하면서 점점 더 겸허해지는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발이 너무 아파서, 조금 걷다 쉬고, 조금 걷다 쉬고 해야 했지만, 한 두 달 꾸준히 찾아간 결과 숲 속을 빠르게 걸어도 아프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내 몸의 변화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숲을 찾았다. 발이 뻐근해서, 글이 잘 안 풀려서, 새로운 생각이 필요해서... 그렇게 매일 오는 나를 보며, 이 숲을 자주 찾으시는 분들이 하나 둘 말을 걸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그렇게 인사를 나누다 어느새 나는 자주 보는 분들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자기야, 여기 매일 오지?"
안경을 쓴 어머니와 뽀글 머리 어머니가 물었다.
"네, 매일 와요."
"어제도 왔지? 우리가 봤는데..."
"네, 맞아요.
"자기는 여기 왜 오는 거야? 어디 아파?"
"아, 아뇨. 저는 작가인데, 글이 잘 안 써지면 여기에 와요."
"아 그렇구나. 작가라 오는 거구나. 여긴 아픈 사람들이 많이 오는 숲이야."
"그래요?"
"여기는 고혈압, 당뇨는 아주 그냥 병도 아니고, 그거는 몇 달 만에 쉽게 고치고... 대부분 암 환자가 많아."
"암이요?"
"응, 암도 다 고치잖아. 너무 심하게 아픈 것만 아니면..."
"진짜예요?"
"응."
그 뒤로 많은 어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주로 본인이 암에 걸렸거나, 남편이 암에 걸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우리 남편은 췌장암이었는데, 수술하고 이 숲에 3년 동안 왔어. 지금은 다 완치되었어."
이곳에 오면 정말 암을 완치할 수 있는 건지, 남편분께서 초기라서 완치가 된 건지, 아니면 컨디션이 좋아지신 걸 과장해서 한 말씀인지 나는 다 알 수 없었지만, 그분이 컨디션이 좋아지신 건 확실한 것 같았다.
여기 오는 많은 사람이 대부분 나에게 맨발 걷기로 몸이 좋아졌다는 말을 많이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흙이 주는 생명력이 엄청나다는 걸 알았다. 두 다리만 땅에 착 붙일 수 있으면 우리는 혹시 어떤 병이든 고칠 수 있는 것 아닐까?'
여기 숲은 그리 크지도 않은 데, 이 작은 땅이 인간에게 그렇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숲을 좀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잠깐 와서 흙을 밟는 것만으로도 난치병이 나을 수 있다면, 후손을 위해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그런 뻔한 말을 하는 것보다는 숲이 주는 강한 생명력을 믿고, 우리가 나중에 늙거나 아플 때를 대비해서 갈 수 있는 숲도 좀 남겨둬야 하지 않나? 하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나는 만나는 사람에게 소산오름 맨발 걷기를 추천했고, 나의 지인들은 나를 따라 종종 이곳을 방문했다.
"자기야, 여기 정말 좋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 같아."
"뭔가 딱 집어 말할 순 없는데, 정말 기분이 좋아."
"덕분에, 신기한 경험을 하네요."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이었고, 나는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는 행복한 경험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덩달아 행복해졌다. 혹시라도 누군가 지금 많이 아프고 서럽고 불안한 사람이 있다면, 꼭 한 번 어디든 가서 맨발 걷기를 해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