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편안히 쉬었다가는 ‘올래파이’
요즘 제주는 장맛비가 한창이다. 날씨가 많이 변해서 그런지 맑다가 습하다가 세차게 비가 오다 살짝 열대우림기후 같다. 봄비처럼 비가 부슬부슬 오면 하늘에서 삼다수가 내린다고 생각하고 산에 갈 수 있겠는데, 여름 장맛비는 세차고 매섭고 종잡을 수 없어 불안하다. 이런 날씨에 산에 갔다가는 조난당하기 딱 좋다. 그래서 그런지 산에 못 가는 심심한 일상의 연속이다.
오늘 새벽에도 나는 세찬 비와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보통 잠들면 천둥소리에 깨어나진 않는 데 여름밤 공기가 좋아 창문을 열어두고 잤다가 하늘이 뚫리는 듯한 소리에 놀라서 깼다. '아, 창문 닫아야 하는 데...' 이런 생각으로 비몽사몽간에 졸다 깨기를 반복했다.
나는 우리 동네를 참 좋아하는 데, 보통 제주에서는 해발 200m 이하에 사람이 살아야 한다고 하던데 우리 집은 해발 300m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우리 집이 하얀 연기 속에 있는 날도 있는데, 내가 구름 속에 있는지 안갯속에 있는지 헷갈리면서 몽환적이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산간 지방의 스펙터클한 기후를 체감하며 결국 오늘 나는 잠을 설쳤다.
어느 토요일 아침, 애매하게 친구를 30분 정도 기다려야 하는 날이 있었다. 장맛비도 너무 세차게 쏟아져 우산을 쓰고 주차장에서 카페까지 들어가기도 애매한 날 나는 차를 타고 빙빙 돌다가 <올래파이>라는 카페를 발견했다. 카페 정문 앞에 바로 주차할 수 있고 주차 후에는 천막 테라스를 통해 비를 맞지 않고 매장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어 좋았다.
'어? 저기 주차하고 들어가면 비 하나도 안 맞겠다.'
나는 혼자서 새로운 공간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주차장에 앉아 30분을 기다리고 싶진
않았다.
카페 안을 들여다보니 통창으로 보이는 샹들리에가 예뻤다. 경험상 샹들리에가 달린 카페는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카페도 그럴 것 같았다. 그리고 샹들리에는 청소하려면 진짜 부지런해야 하는데, 그래서인지 사장님들이 깔끔한 스타일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입구 앞에서 이름 때문에 '파이 집인가? 커피를 안 팔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색할 것 같아 선뜻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그래도 비가 너무 세차게 오고, 비를 안 맞고 들어갈 수 있는 아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한 번 용기를 내어 들어가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머뭇거리며 인사를 하고 들어가는 데, 사장님은 별다른 말씀이 없었다. 뭐 그래도 엔틱 한 하얀 가구와 천장에 달린 커다란 두 개의 샹들리에 노란 전구들이 예뻐서 좋았다. 찬장에는 왕궁에서 쓸 법한 식기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카페쇼케이스에 들어 있는 먹음직한 케이크들도 다양했다. 가장 맘에 드는 건 전등의 불빛 색과 흘러나오는 뮤지컬 분위기의 음악이었다. 곳곳에 걸린 수채 색연필 드로잉도 좋았다.
나는 혼자 왔기 때문에, 한 구석의 2인석에 앉기로 했다. 보통 작은 테이블은 좁고 불편한데, 이 테이블은 아늑했다. 나는 모든 게 꽤 마음에 들었다.
테이블의 샹들리에 무늬 타일 아트가 마음에 들었고, 초록색 줄무늬의 푹신한 쿠션이 좋았다. 테이블 위에는 빨간 구두를 신은 여자 사진이 놓여 있었는데, 무표정한 얼굴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눈앞의 회색 벽에는 다양한 그릇이 붙어 있었고, 검은색 화로 위에 투명 동그라미가 붙은 버섯모양 스탠드가 내 취향이었다.
나는 원래 동글동글한 무늬를 좋아하는데... 나름 둥글게 살고 싶다는 뜻을 담고 있달까? 달팽이, 수국, 버섯, 동그라미 같은... 그냥 이곳은 내가 좋아하는 걸 모두 갖다 놓은 곳 같다. 화로 위에는 작은 스피커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아이패드를 꽂아서 음악이 나오고 있었는데, 어느 브랜드 스피커인지는 모르겠지만, 음질이 좋았다.
요즘 나는 커피를 끊었는데, 루이보스 티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블렌딩 되어 있지 않은 루이보스 티는 약간 낙엽 같은 맛이 나기 때문에 어떤 티 브랜드를 쓰시는지 몰라 그냥 무난하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보통 원두가 오래되거나 잘 못 로스팅하면 배가 아플 만큼 커피가 쓴데, 나는 이곳이 맘에 들었기 때문에 좋은 기억을 끝까지 가져가고 싶어서 오늘만큼은 꼭 맛있는 커피가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장님은 별 다른 말없이 계산하고 아메리카노를 만드셨다. 나는 인테리어가 맘에 들어 연신 사진을 찍고 내가 고른 좌석에 앉아 이곳 분위기를 즐겼다.
다른 카페에 비해 커피가 굉장히 늦게 나왔다. 카페가 청결한 만큼 커피도 깐깐하게 내려주시는 것 같았다.
'커피 맛있을 것 같은데?'
나는 기대를 갖고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적당한 농도에 목 넘김이 좋았다. 보통 쓴맛이 심하면 속이 쓰리기도 하는 데 이 커피는 적당히 진하고 신선해서 속이 쓰리지 않아 좋았다.
나는 이날 컴퓨터를 들고 오지 않아 친구를 만나기까지 남아있는 애매한 30분을 뭐 하고 보낼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분위기와 뮤지컬스러운 음악에 취해 멍하니 노래를 들었다.
나는 레코드 카페는 가본 적이 없지만, TV에서 종종 봤었는데... 아마 그곳에 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노래 멍'을 때릴 수 있는 분위기를 좋아해서 가는 것 아닐까?
나는 초록색 줄무늬 쿠션에 몸을 기대고 가만히 쉬었다. 나에게 카페는 일하거나 책 읽는 곳이지 카페에서 쉴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이곳은 편안하게 쉴 수 있어 좋았다.
'그냥 멍 때리고 있다가 가야지. 이런 카페는 또 처음이네...'
나는 샹들리에의 적당한 조도가 좋았다. 잠시 산소방 같은 곳에서 쉬고 있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천둥소리에 잠을 설친 나는 오늘도 <올래파이>에 가기로 했다. 몸이 찌뿌드드하기도 했고,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젖는 게 싫어서 왠지 또 가고 싶어졌다.
"안녕하세요?"
주차를 마치고 익숙한 곳이라는 생각에 당당히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데 여자 사장님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아... 저희 아직 오픈 전인데요...?"
아, 지난번 <올래파이>에 와 봤다가 분위기에 반한 나는 블로그에 영업시간을 업데이트했었는 데... 내가 오픈 전에 오다니... 나 자신도 황당했다.
"어? 어떻게 하죠? 아..."
당황해서 나의 주특기인 아무 말이 나왔다.
"비도 오는 데 이렇게 찾아와 주셨는데, 저희가 감사하죠. 지금 테이블 닦고 있어서 그런데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청소만 다 하고 준비해 드릴게요."
"네. 그러면 저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만 주세요. 천천히 주셔도 돼요."
나는 미안한 마음에 ‘천천히’를 엄청나게 강조하며 말했다. 오늘 카페에 나오는 노래들은 저번보다 약간 더 대중적인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모두 내가 아는 노래는 아니었다. 나는 평소에 안 듣는 이런 음악들도 좋다고 생각했다.
음악 선곡은 어떻게 하시는지, 스피커 브랜드가 뭔데 이렇게 음질이 좋은 건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오늘도 나는 이곳 분위기에 취해 조용히 음악을 듣다 퇴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피커 바로 앞자리라 음악에 취해서 그런지 오늘은 노트북을 들고 왔지만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글을 쓰다 음악을 듣다 자유롭게 있다 가기로 했다.
나는 핸드폰을 들고 페이스북으로 그간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 메신저를 했다. 이곳 분위기 때문에 아침인데도 쉽게 감성적이 되었다. 혼자 있지만 사람들과 함께 있는 느낌이 좋았다. 다음에 올 때는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과 와서 격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쉬다가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다음에도 뭔가 지쳤을 때 또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올래파이>
제주시 연동 14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