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나는 가장 흥미진진할 것이라 들었던 장애물 90cm 경기를 관람하러 경기장으로 향했다. <덜커덩 선생님>은 반려견 뿌꾸와 함께 관중석에 계셨고 <덜커덩 선생님>이 가르치는 제자들이 선생님 옆에 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나는 선생님께 인사하고 옆자리에 앉았다.
"쌤, 이번 대회에서는 90cm 경기가 가장 높은 거죠?"
"네. 그렇죠. 제주에서는 90cm가 가장 높고요. 육지에는 100cm 이상 되는 경기도 많아요. 150cm도 있으니까요."
150cm 면 성인 여자 키 정도 높이에 가까운데 말을 타고 그걸 어떻게 넘는지 도저히 상상도 안 간다. 뜀틀도 높으면 무서운데 하물며 말을 타고 그 높이를 넘는다고?
"쌤, 그 정도면 거의 광개토대왕급 아니에요?"
나는 광개토대왕이 말을 타고 산에서 바위를 뛰어넘는 상상을 하며 말했다.
"네?"
선생님은 승마에서 광개토대왕 비유는 예상 못 하셨는지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보시다가 웃으셨다. 말을 타면서 나는 '달리는 말에서 활을 쏘는 건 얼마나 강해야 할 수 있는 것일까?'를 많이 생각해 보았다. 말만 타는 것도 어렵고, 활만 쏘는 것도 어려운데 달리는 말에서 활을 쏜다고? 그래서 우리 민족이 강한 민족인가 보다.
"선생님, 옛날에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려면 대체 얼마나 강해야 하는 거예요? 아마 옛날에 우리 민족 정신력 하나는 끝내줬을 것 같아요."
"그건 말을 그렇게 트레이닝시켰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죠. 생각해 봐요 선생님. 선생님이 말을 끌고 이 경기장을 한 바퀴 돈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럼, 얼마나 힘들겠어요? 말이 잘 따라오지도 않을 테고 말이죠. 하지만 만약에 훈련을 잘 시킬 수 있다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사인 한 번만 주면 말이 알아서 갈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도 어쩌면 말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선생님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전화가 걸려 왔다. 선생님은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뜨셨다. 뭐 선생님 말씀이 맞다. 인간이 진정 강해지려면 그것은 내 실력만 키운다고 되는 문제도 아니다. 나는 그동안 상황에 상관없이 자기 할 일만 잘하면 모든 게 괜찮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도 했었는데, 내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승마에서는 그런 생각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내 실력도 중요하지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게 상황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면 경기에서 말의 경로를 제대로 세팅하고 컨트롤을 확실히 한다거나 그 이전에 말을 제대로 트레이닝한다거나.
강아지도 인간과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일종의 트레이닝이 필요하듯 고대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 살아온 말도 그럴 텐데... 내가 나만 잘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식으로 지금껏 나에게 극한 상황을 가져오는 많은 환경을 그대로 방치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광현 님의『가족의 두 얼굴』이란 책의 298페이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극한 상황에서 마주하는 삶의 진지함은 자아가 허약한 아이들에게 자극과 치료제가 된다.' 책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청소년 치료로 '승마학교'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이곳의 아이들은 각자 개인의 말을 배정받고 말의 훈련과 청소 관리까지 책임을 맡음으로써 말과 교감하면서 정서적 안정, 책임감과 의무감을 배운다고 한다. 나는 문득 '말의 훈련이란 게 어쩌면 의존심을 끊고 자신이 직접 상황을 적절히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는 자아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나도 말을 키워보면 좋겠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쩌다 기회가 된다면 말을 직접 길러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아직 말과 교감은 못 하는 것 같지만 내가 동지는 좋아하니까. 뭐. 동지가 나를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뭐. 나는 처음에 말을 키우려면 억대의 돈이 드는지 알았지만 운 좋게도 제주에서는 비싼 강아지 키우는 금액 정도로 말을 쉽게 키울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다.
'뭐야, 승마. 계속 무섭기만 한 줄 알았는데 원래 이렇게 좋은 운동이었음?'
나는 아직도 다른 운동은 쉽게 되는 데, 왜 승마만 유독 이렇게 안 되는지 계속 이유를 찾아가는 중이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스스로를 발견해 나가다 보니 정신이 점점 강해지는 것 같아 의미 있다고 느낀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개인이 보내는 한적한 시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보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문화, 예술, 취미, 레저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장점을 발견해 나가고 계속해서 부정적 정서에 빠지지 않게 만드는 어떠한 방법도 인간의 삶에는 모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아마 어쩌면 나는 뒤늦게 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중일까?
"선생님, 저는 이따 오후에는 여기 없을 거예요. 만약에 재미있는 경기를 구경하고 싶으시면 단체 릴레이 경기 한 번 구경해 보세요."
잠시 통화를 마치고 돌아오신 <덜커덩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릴레이 경기라고요?"
나는 운동회 때 400m 릴레이 경기를 구경해 본 적은 있지만, 말을 타고 릴레이 경기를 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너무 궁금해서 경기가 진심 기대되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릴레이 경기장엔 모르는 분들이 가득했다. 릴레이 경기가 재밌다더니 역시 지인의 경기를 응원하는 주민들이 많은 눈치였다. 나는 팸플릿을 보고 잠시 앉아 있다가 경기장의 경로도 바뀌고 뭔가 분위기도 색달라서 신기한 마음에 난간으로 바짝 다가가서 사진을 찍기로 했다.
경기장은 2개로 분할되어 A 구역과 B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두 팀이 경기장에 나와 각각의 구역에서 경기를 수행하는 방식이었다. 한 팀엔 3명의 선수가 출전하고, 각 선수가 교대로 말을 타고 마장에 놓인 세로형 장애물 2개를 돌아오는 방식이었다. 구체적인 규칙은 첫 번째 장애물을 1바퀴 돌아 반환점으로 사용하는 두 번째 장애물을 2바퀴 돈 뒤 다시 첫 번째 장애물을 1바퀴 돌고 결승선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첫 번째 주자가 결승선 안쪽으로 들어오면 말에서 내리고, 두 번째 주자가 그 말을 탄 뒤 다시 장애물을 돌아온다.
이번 경기에는 총 5개 팀이 출전해서 한 팀은 부전승으로 이미 올라간 상태였다. 잘은 모르지만, 승마클럽 간 대항전 느낌이 강해서, 릴레이 경기는 자존심이 결린 문제 같아 보였다. 첫 번째 경기에서는 차분히 잘 타는 1번 주자를 보유한 팀이 가뿐하게 상대 팀을 이기고 올라갔다. 두 번째는 경기에 참여한 어떤 선수 덕분에 장내가 시끌시끌했다. 아마 동네에서 인기가 많으신 분 같다.
"야야 봉진이 탄다. 봉진이."
"야 봉진아 너이 잘 타야 된다.'
나는 승마는 늘 점잖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강한 운동이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제주에서는 그냥 운동회 하듯 편하게 타는 게 승마 같다. 나도 언젠가 릴레이 경기에 가나서 동네 사람들의 응원을 받는 날이 오면 재밌을 것 같다. 두 번째 경기에 참여한 팀은 첫 번째 경기에 참여한 팀 보다 야생의 느낌이 나게 말을 탔다. 선수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등자에 발을 안 올리고 그냥 출발하기도 한다거나, 달려오다가 반환점을 잊어서 다시 가서 반환점을 돌고 온다거나. 말 타는 방식이 뭔가 자유롭고 푸근했다.
"에이, 봉진아 너이 거기 돌아왔어야지."
경기가 끝나고 여전히 관중들이 웅성웅성거렸다.
'릴레이 경기 참 재밌네?'
나는 호기심에 마지막까지 릴레이 경기를 관람하기로 하고 사진 몇 장을 더 찍었다.
드디어 결승전. 첫 번째 경기에서 차분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던 팀이 역시나 결승전에 진출했다. 아무래도 유력 우승 후보팀이 아닐까 싶었다. 그 팀은 경기 시작 전에도 연습장에서 선수 교체하는 방법을 꾸준히 연습했다. 계속 보다 보니 릴레이 경기는 선수 교체 시간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팀이 우승 확률이 높은 것 같았다.
잘하는 팀의 전략은 이러했다. 한 주자가 말을 타고 들어오면 말의 오른편으로 내리고, 오른쪽에서 말을 고삐를 잡고 있는 동안 말의 왼편으로는 다음 주자가 말에 오르면 되는 데, 이때 세 번째 주자는 말의 왼편으로 다가가 말을 타는 선수를 도와준다. 말을 타는 선수가 말 등에 잘 안착하면 양옆의 선수가 말을 탄 선수의 발을 잡아주어 말 등자에 안정적으로 올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역시 인간의 삶에선 승리하려면 타인과의 협력이 중요해.'
결승전이 시작되고 처음에는 양쪽 팀이 팽팽하게 접전을 이뤘다. 한데 두 번째 주자에서 말이 경기장 밖까지 달려 나갔다. 아쉽게도 실격 처리되고 차분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던 팀이 우승했다.
"아이, 말이 나가버리네."
관중들은 아쉬움이 섞인 탄성을 보냈다.
이 정도 큰 경기에 나오려면 선수들 모두 다 클럽을 대표하는 잘 타는 사람들일 텐데, '역시 말을 컨트롤하는 일은 쉽지 않은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