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말을 타고 산길을 달려요.

by 김용희

"이번 외승은 B 코스로 갑니다."


수요일 4시 30분. 일몰 시각으로 인해 지난주보다 30분 일찍 H 승마장에 모인 우리는 이미정 선생님을 따라 B 코스로 향했다. 지난번에는 승마장 아래쪽 편백 숲길을 달렸었는데, 이번에는 승마장 뒤쪽 산길로 올라갔다.


산길은 곳곳에 무덤이 많이 있었지만, 저 멀리 오름과 바다가 보여서 경치가 그림같이 아름다웠고 하늘의 걸린 구름은 마치 그물을 쳐 놓은 듯 눈부셨다.


오늘도 나는 쥴리를 타고 가장 앞쪽에서 달렸다. 가장 앞에 있으면 미정 선생님께서 우리 팀의 사진을 찍어주실 때 내 사진이 너무 많이 찍혀서 살짝 부담스럽긴 하지만 쥴리가 워낙 잘 달리기 때문에 앞에 다른 말이 진로를 방해하지 않아 속도감도 좋고, 움직임도 안정적이고 균형잡기도 좋다.


지난번에는 경사가 완만한 곳에서 좀 천천히 달렸었는데, 오늘은 경사가 급한 곳을 빠르게 달렸다. 나는 평소에 센터에서 동지를 탈 때는 내가 만약 과거 시대에 살았다면 동지와 함께 어찌 한양에 갈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었는데... 쥴리와 함께라면 이대로 한양까지 달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여기는 제주도이니까 바다도 건너야겠지만, 상상 속에서는 무슨 생각인들 못 할까? 그만큼 나는 쥴리가 믿음직하고 좋았다.


언덕에 다다르자, 이미정 선생님은 우리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주셨다. 쥴리는 이곳의 길을 모두 알고 있는지, 멈춰서서 산 아래의 풍경을 잠시 감상했다. 쥴리는 몸을 대각선으로 틀어 사진이 잘 나오도록 방향을 잡아주었는데, 아마 이곳이 H 승마장의 사진 촬영 명소인걸 쥴리도 잘 아는 눈치다. 선생님은 우리가 탄 말 뒤에서 멋진 풍경이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주셨다.


"자, 그럼 다시 달려볼까요?"


내가 가라는 신호를 하지 않아도 쥴리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달려볼까요?"라는 말을 알아듣는 지, 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쥴리가 정말 좋았다. 왠지 쥴리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어서인지 나도 쥴리의 움직임에 쉽게 몸을 맡길 수 있었다.


귓가로 제주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등 뒤로 열감이 올라왔다. 허리를 펴고 골반으로 산길을 달리다 보니 후끈하고 시원한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힘차게 산길을 달리니 내가 과거 시대 어느 곳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자 이제 여기서 사진을 좀 찍고요. 아래쪽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우리는 산 중턱쯤에서 한명 한명씩 사진을 찍은 후, 돌담 사잇길에서 방향을 전환해서 내려가기로 했다. 내가 가장 앞에서 쥴리를 왼쪽으로 돌렸다. 쥴리는 워낙 똑똑한 말이라서 내가 팔꿈치를 몸통에 붙이고 몸을 왼쪽으로 돌리기만 해도 알아서 방향 전환을 해준다.


"오, 용희. 실력 많이 늘었는데? 이제 방향 전환도 잘하네?"


뒤쪽에서 김 반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제가 조금 움직이면 쥴리가 알아서 해주는 거예요."


우리의 대화를 듣던 이미정 선생님께서도 한마디 하셨다.


"많이 느셨죠? 여기 와서 많이 느셨어요."


두 분의 칭찬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정말로 아주 간절히 말을 좀 잘 타고 싶다. 나는 왜 승마가 이리도 어려울까? 혹시 계속 이렇게 산길을 달리다 보면 내 마음도 열리려나? 센터의 담임 선생님이신 <오늘의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나는 마음만 열리면 잘 탄다고 하시던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눈앞에 그림같이 펼쳐진 산맥이 보였다. 제주에는 오름이 많고 큰 산은 한라산밖에 없어서 산맥을 보기 힘든데, 여기는 어떻게 산맥이 있는 거지? 이곳은 제주이지만 마치 제주가 아닌 듯 묘한 곳이다.


"선생님, 여기는 어떻게 산맥이 있어요? 여기 제주도 아닌 것 같아요."


"아, 저기는 아흔아홉골이라는 곳이에요. 크고 작은 골짜기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정말 아름답죠? 겨울에는 눈이 쌓이면 경이롭고, 봄에는 벚꽃도 아름다워요."


"정말 멋지네요."


우리는 아흔아홉골을 왼쪽에 끼고 말을 달려서 내리막으로 내려왔다. 오는 길에 무덤가에서 뛰노는 아기 노루들을 만났다. 하얀 노루 궁둥이가 귀엽고, 인상적이었다.


"노루 안녕? 선생님, 저기 노루가 있어요. 쟤들은 여기 사는 애들인가 봐요."


"맞아요. 겨울에는 먹을 것을 찾아 우리 승마장까지 내려온다니까요."


승마장에 다다르자 우리는 좌속보로 달리기로 했다.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좌속보는 안장 깊숙이 앉아 어깨는 바르게 고정하고 엉덩이로만 달리면 된다는 데, 나는 그냥 쥴리가 가주고, 엉덩방아로 달렸다. 좌속보가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대충 엉덩이를 잘 붙이고 말의 움직임에 맞춰 통통 통통 달리면 되는 것 같다.


산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처음 산길로 올라오던 초입 급경사에 다다르자 우리는 급격한 내리막을 만났다. 말을 타고 내리막을 걷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는데, 백마인 앨리스는 겁을 좀 내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믿음직한 쥴리 덕분에 두려움 없이 내리막도 편안하게 내려왔다. 저 멀리 꿩 한 마리가 우리를 보고 들판을 달려서 도망갔다.


과거의 어느 시절로 타임슬립 한 듯 제주의 자연을 감상하며, 편안하고, 행복했던 외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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