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희 씨 왔어요?"
12월이 시작되는 수요일 오전, H 승마장에 도착한 나는 이미정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곳 승마장은 전반적인 분위기가 좋아 지나치게 긴장되거나 두렵지 않고 마음이 즐겁다. 나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시는 이미정 선생님께 인사드린 후 오늘 처음 만난 강습을 받는 다른 분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용희 씨는 쥬디 타세요."
H 승마장에서 많은 말을 타본 건 아니지만 나는 쥬디가 좋다. 아마 선생님께서도 이런 나의 마음을 아시는 듯 오늘 쥬디를 배정해 주셨다. 내가 알기론 쥬디는 이 승마장에서 좀 까칠한 성격의 서열이 높은 말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쥬디를 좋아하는 이유는 쥬디가 내 말을 다 알아듣는 듯하기 때문이다.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쥬디는 다른 말보다 인간과의 교감 능력이 뛰어난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건 나는 그냥 쥬디랑 있으면 편안하다. 나는 쥬디가 잘 달려줄 걸 알기 때문에 불안감이 사라지고 쥬디랑 달리면 마음이 아주 잘 통한다. 가장 신기한 건 내가 위에서 실수로 쥬디에게 잘못된 신호를 줘도 쥬디가 상황을 판단해서 알아서 대응한다는 점이다. 승마를 잘하는 분들이 들으면 컨트롤 못하는 내가 많이 부족해 보이겠지만, 일단 내게 쥬디는 든든함의 끝판왕 임은 확실한 것 같고, 나는 그냥 쥬디를 이 승마장의 선생님 급 교관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쥬디 안녕? 잘 잤어? 아침에 보니 반갑지?"
나는 쥬디에게 말을 걸며 쥬디를 마방에서 데리고 나와 마장으로 향했다. H 승마장은 아침마다 말들을 목욕시킨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쥬디의 몸이 젖어 있다. 처음에는 말이 추우면 어쩔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말들은 시원한 걸 좋아해서 씻겨주면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 쥬디의 컨디션은 좋아 보였다.
'오늘은 어떤 걸 배울까?'
이미 기승 경험이 있어서 오늘 내가 무엇을 배우게 될지 무척 궁금해졌다. 전에 이미정 선생님께서는 기본자세를 좀 잡아주신다고 했었는데, 오늘 나는 그간 몰라서 답답했던 것들을 차근히 배우는 기회가 될 거로 생각했다.
마장은 바깥쪽 트랙과 안쪽 편백 숲으로 되어 있는 독특한 구조였다. 나는 오늘 처음 수업을 듣게 되어 트랙 안쪽 편백 숲 앞에 쥬디를 멈추게 했다. 옆에는 핑크 패딩의 어떤 분이 함께 계셨다. 아마 오늘이 12월 첫 날인 관계로 나와 같이 등록한 신입회원분이 아니실까 했다.
H 승마장에서의 승마 수업은 외승에서 만났던 세 분의 선생님이 한 번에 투입되었다. 먼저 이미정 선생님은 마이크를 켜고 트랙 쪽에서 이미 익숙하게 잘 타시는 회원분들을 지도하시며 수업하셨고, 트랙 안쪽에는 하희숙 선생님이 오늘의 신입 회원인 나와 핑크 패딩 입으신 분을 지도해 주셨다. 마지막으로 사장님은 대기하고 계시다가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트랙 곳곳의 말똥을 치워주셨다.
'세 분이 분업해서 일을 하니까 수업이 효율적으로 돌아가네?'
나는 분위기 좋은 승마장에서 기왕 이렇게 수업을 등록하게 된 만큼 열심히 배워서 이번에는 꼭 말을 잘 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오늘은 한 번 앉는 자세부터 배워보도록 할게요."
오늘은 첫 수업인 만큼 나는 앉는 자세부터 다시 배웠다. 오늘 드디어 그동안 깜깜했던 의문들이 풀릴까? 나는 잔뜩 기대하고 수업에 집중했다. 하희숙 선생님께서는 내 자세를 보시고는 내게 발목을 바르게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특히 발꿈치를 뒤로 내려야 한다고 하시면서 허벅지를 안장에 감싸 안듯이 밀착하고 정강이는 고정한 채 발목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올렸다 하는 자세를 차분히 가르쳐 주셨다.
"용희 씨, 지금 잘하고 계시는데요. 정강이부터 위쪽으로는 자세가 다 맞는데 아쉽게도 지금 발목을 안 쓰고 있어요. 그 상태에서 발목을 한 번 아래쪽으로 내려보세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발꿈치를 아래쪽으로 최대한 내려보다가 내 승마 자세가 뭔가 크게 잘 못 되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나름대로 최대한 발목을 아래쪽으로 내려보려고 했지만, 일단 발목 근육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발목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자꾸 하이힐을 신은 것처럼 발꿈치가 하늘로 하늘로 자꾸 올라갔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가 승마를 제대로 못 한 것은 나는 그동안 말 위에 앉아서 발목을 원래 써야 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계속 쓰고 있었던 것 이다. 이렇게 발목을 쓰면 자동으로 몸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기울어지고, 달리는 말 위에서는 앞으로 쓰러질듯 움직일 수밖에 없다.
"승마를 하실 때는 발 뒤꿈치를 중심선으로 해서 몸의 최대한 고고하게 뒤쪽으로 펴세요. 머리는 하늘에서 잡아당긴다고 생각하시고요."
선생님 말씀에 나는 고관절을 최대한 늘리고 상체를 하늘로 쭉 잡아당기는 자세를 취했다. 여러해 동안 고이 접어두었던 내 고관절은 단박에 잘 펴지진 않았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다리를 꼬고 앉지 말라고 하나 보네.'
승마 자세는 내가 늘 취하던 다리 꼬고 앉는 자세의 정확히 반대 근육을 모두 쓰는 거였다. 나는 그동안 말 위에 그냥 앉아서 있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바른 자세로 중심을 딱 잡고 앉았어야 했던 건가 보다. 계속 무게 중심을 코어와 꼬리뼈 쪽에 두고 중심을 잡고 앉다 보니 접혀 있던 내 고관절이 펴지면서 피가 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는 절대 고관절을 접어두지 않아야겠네.'
잘 될진 모르겠지만, 계속 말을 타면서 내 몸이 바른 자세를 기억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용희 씨, 지금 됐다 안 됐다 하는데요. 그것도 다 잘 되려는 과정이예요."
선생님께서는 나를 지속적으로 격려해 주시면서 다리 모양을 잘 잡을 수 있도록 지도해주셨다.
"용희 씨, 지금 발 날 쪽으로 자꾸 힘이 들어가는데요. 최대한 발 안쪽 엄지발가락 밑쪽부터 발뒤꿈치 중앙으로 허공을 디딘다고 생각하시면서 몸을 위쪽으로 움직여 볼게요."
오른쪽 복숭아뼈 쪽 근육이 좀 뻐근해 왔다. 왼쪽은 그나마 움직이는 데 오른쪽 발목은 그간 잘못된 자세로 살아왔는지 요지부동이었다.
"자, 이번에는 등자에서 발을 빼고, 자기 몸에만 의지해서 말 등에서 일어서 볼게요."
나는 등자에서 발을 빼고,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은 채 말 등에서 발목, 무릎, 골반의 힘만을 이용해서 일어서 보려 했다. 당연히 잘되지 않았다.
"앞에 손잡이 잡으셔도 괜찮고요. 잘 안되면 뒤쪽 안장을 살짝 잡고 몸을 일으켜 보세요."
손잡이를 잡고 일어서보려고 했지만, 괜히 애먼 손잡이만 밑으로 누를 뿐 몸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았다. 발목을 최대한 뒤로 내리고 중심을 잡은 후 다시 해보니 발목을 최대한 밑으로 내리고 다리에 힘을 제대로 줄 수 있어야 코어가 힘을 받아 몸을 올릴 수 있었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이 상태로 몸을 쉽게 일으킬 수 있다면 말 등에서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거라 하셨다. 선생님이 훈련하실 때는 말 등에서 등자를 빼고 구보까지도 해보셨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면 말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코어의 힘만으로 스스로 몸을 세울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다가 문득 유튜브에서 보게 된 어떤 사람이 생각났다. 안장과 등자를 다 빼고 맨몸으로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아마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모습이 그런 게 아닐까? 혹시 나도 말 등에서 등자를 뺀 상태로 몸을 일으켜 세울 만큼 내 몸 근육을 단련시킬 수 있다면 그간 의존심을 모두 끊어 낼 수 있는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