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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니보이 Jan 29. 2022

통영 전혁림 미술관 방문기1

짙은 코발트블루가 텔레비전 가득 비췄다. 

십 년 전 아흔넷의 나이로 짙은 푸르름을 남기고 고향 통영 바다에 녹아든 화가 전혁림, 

그가 남긴 천호 규모의 ‘한려수도’ 가 한가득 비춰, 그 푸르름을 보려고 통영으로 향했다. 

짙은 또는 검푸른 통영 바다가 넘실대며 넘쳐 들어왔다. 

옅은 봄바람에 벚꽃잎들이 흩뿌리는 통영-봉평동-전혁림거리, 

푸른 벽 위엔 타일로 구워진 그의 작품들이 이 거리의 주인임을 얘기하고 있었다. 

작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면 터줏대감처럼 따뜻한 이름의 작은 책방이 있고 

그 옆에 ‘전혁림 미술관’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다. 

삐거덕 열어야 하는 대문이며, 사람을 부르는 초인종도 없이 한발만 내디디면 

전혁림의 영토에 들어선다. 아니 통영의 Cobalt 바다를 지나면서 나는 이미 그의 영토에 들어와 있었다. 


전혁림 화백은 음력 1915년 2월 경상남도 통영군 무전리 478번지에서 전계주의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수산중학교에 진학 후 학업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으나 

다행히도 화가인 일본인 교사에게서 미술을 배울 수 있었다. 

수산학교를 졸업하고 금융조합에 근무하던 중 1935년에 일본인화가 ‘도고 세이지’의 

하기 양화 강습회에서 일주일 동안 배웠는데 이것이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전부였다. 

이후 작품활동을 하다 1938년 부산미술전에 유화 ‘신화적 해변’, ‘월광’, ‘누드’로 입선하여 

부산 경남 지역의 신진 화가로 주목을 받게 되며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광복 후 통영 여중·고 교사였던 동랑 유치진, 청마 유치환, 윤이상, 초정 김상옥, 대여 김춘수 등 이름도 쟁쟁한 예술가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창립하여 통영 문화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국전쟁기에는 부산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부산의 ‘밀다원’에서 제1회 개인전, 

같은 해 통영 ‘호심다방’에서 ‘이중섭, 유강렬, 장윤성, 전혁림-4인전’을 가졌다. 

그는 1949년 국전에 처음 입선한 이후 여러 차례 출품하여 수상하였으나 

심사과정에서 환멸을 느껴 국전을 외면하며 작품활동을 하다 

1977년 63세의 나이로 부산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통영으로 돌아왔다. 


짙푸른 전시실 문을 살며시 밀고 들어서니 짙은 오크 색 나무 마루의 아담한 전시실이 펼쳐졌다. 오래전 노화가를 만났던 기억으로 바로 옆에서 자신의 작품을 얘기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얀색 왼쪽 벽면 절반 정도를 차지한 아름다운 통영항이 다양한 청색의 그라디에이션으로 

자신을 한껏 들어내고 있었다. 

전혁림의 통영, 통영의 바다. 그리고 그 바다의 색깔. ‘푸르다, 파랗다, 검푸르다, 푸르스름하다, 파르스름하다, 푸르청청하다, 거무튀튀 푸르다, 엷은 청색, 맑은 청색, 깊은 청색’ 등 

끝없는 청색의 변주곡이 그의 그림 속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청색과 더불어 전혁림 화백을 나타내는 것은 오방색이다. 

음양 사상에서 목화토금수의 요소를 오행이라 했고 그 오행에 해당하는 색깔을 

청적황백흑으로 보았다. 

청색은 동쪽과 봄을 대변하며 우주 만물의 원천적인 힘을 상징하는 역할을 하였다. 

전혁림은 통영의 바다와 하늘을 나타내는 청색-짙은 코발트블루와 앞에서 얘기한 

향토적인 소재인 오방색을 주로 사용함으로써 강렬해 보이는 색채의 조합에서도 

신성감과 더불어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통영항 앞에서



* 2편으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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