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층 벽면의 춤추는 청색, 오방색의 향연을 뒤로 하고 계단을 올라가 이층으로 가면
작은 만다라가 소우주를 보여주고 있었고 한 걸음 옆에는 노화가의 오래된 화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별할 것 같지도 않은 낡은 나이프와 허르스럼한 붓 몇 자루들,
노화가는 청색, 오방색으로 얼룩진 그 소품들로 말을 걸고 있었다.
노화가의 화구들
어느 인터뷰에서 화백은 ‘회화는 이야기에서 발전한 것이며 얍삽하게 물감만 발라 내놓는 그림을 보면 불쾌하다.’ 고 했다. 그가 만든 이야기들로 통영은 온통 물들어 있었다.
한편으론 낡은 화구들에서 보이는 예술가의 신산(辛酸)한 삶의 여정에 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드디어 그의 시간이 왔다. 1979년 65세의 나이에 <계간미술> 여름호의 ‘작가들을 재평가한다.’ 에서
과소평가 받은 작가로 등장한 이후 제대로 그림을 팔기 시작하였으니 화업에 들어선 후
고단한 삼십여 년의 예술가의 여정, 예술가 가족으로서의 삶이 보이는 듯하여 아픈 마음이 절로 들었다.
이후 생활도 안정되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마침내 86세인 2002년에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의 한 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삼 년 뒤 아흔의 나이에 ‘구십, 아직은 젊다.’란 타이틀로 경기도 용인의 이영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를 앞둔 그는 ‘눈만 뜨면 그림을 그리고 머릿속은 늘 새로운 생각들로 출렁거리고 아이디어가 용솟음칩니다. 시력도 까딱없고 손놀림도 힘찹니다. 하늘이 내게 준 복이지요. 예전보다 더욱 왕성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며 창작 의지를 불태웠다.
젊은 노화가는 이후 몇 년간 열정을 쏟아내다 2010년 아흔 네 살로 천수를 다하였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전혁림을 ‘한국 근현대 명화 100선 작가’로 선정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총체적 한국미와 역사적 전통미를 진정한 애착으로 표현한 작가(이구열),
한국적인 정신의 가장 심오한 현실을 담고 있는 작가(홍가이), 외면적 재현의 형상 언어라기보다는
내면적 추상 언어로 전통적인 이미지의 토착 감정에 집착하고 있는 작가(원동석),
전통적 미감과 뿌리를 같이 하는 작가(윤범모)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평을 보면 전혁림의 작품은 ‘전통과 토착의 색채’, ’지역성과 향토미’를 가지고
한국의 현대 미술사에서 구상과 추상을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전통과 현대를 구현한 작가라는
미술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전 화백의 삶에는 통영의 바다, 하늘이 있었다. 생전 그는 ‘아직도 가슴이 뜨거워, 자나 깨나 통영 풍광이 눈에 선~하고 저걸 어떻게 다 그릴까 하는 생각뿐이야. 시시각각 변하는 통영 바다가 내 그림의 원천이라 할 수 있지’. 라고 말하였다. 이후 전혁림의 ‘코발트블루’는 통영 그 자체가 되었다.
그랬기에 한 시인은 그의 그림을 보고 ‘통영이 시푸르게 걸어 나오는 듯하다’라고 감탄하였다.
그와 교류하였던 김춘수 시인은 ‘전혁림 화백에게’라는 시를 지었다.
전혁림 화백에게 -김춘수-
전화백,
당신 얼굴에는
웃니만 하나 남고
당신 부인께서는
위벽이 하루하루 헐리고 있었지만
Cobalt Blue,
이승의 더없이 살찐
여름 하늘이 당신 지붕 위에 있었네.
‘코발트블루’ 세례를 받고 그의 영토에서 걸어 나오는 끄트머리엔 ‘이승의 살찐 여름 하늘’아래
‘학기둥’ 한점이 그가 ‘우화등선’하였음을 얘기해 주고 있었다.
미술관 앞 ‘학기둥’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