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CD 플레이어 버튼을 눌렀다. 서른 몇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김정호의 애잔하고도 거칠거칠한 목소리는 서늘한 아침 바람에 얹혀 밀려왔고 열린 창문으로 밤새 켜켜이 쌓인 찬 기운은 유난히 싸늘하게 펄럭거렸다.
통영 오행당골목, 지금은 '초정거리'로 불리는 그곳에는 레코드 가게 두 곳이 골목을 마주하고 있었다.서로 경쟁하듯 풀어 놓은 가요에서부터 최신 팝송에다 베토벤의 교향곡들이 스피커 넘어 넘실대던 낭만의 길목이었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 되었지만, 레코드 가게는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들에게 원하는 노래를 녹음하고 편집하여 적당한 가격에 넘겨주는 매력적인 일을 하고 있었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에서 소개해 주는 팝송 제목을 베껴 두었다가 토요일 오후 골목으로 달려가서 가슴을 내밀며 이 노래 LP 있냐고 물어보곤 하였다. 그 나이 때는 다 그랬을까? Led Zeppelin이나 Pink Floyd를 안다고 두꺼운 목소리로 얘기하였지만, George Baker Selection의 I’ve been away too long이나 빽판으로 구한 Aphrodite's Child의 Spring Summer Winter & Fall을 더 많이 들었었다. ‘둘다섯’의 ‘밤배’와 ‘긴머리소녀’를 흥얼거리면서 다니던 아이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던 소위 ‘프로그레시브 록’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친숙한 단어가 나오는 easy listening pop이 더 친숙했던 것 같았다.
어느 프로그램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진 않지만 ‘버들잎 따다가 연못 위에 띄워 놓고 쓸쓸히 바라보는 이름 모를 소녀...’ 로 시작되는 노래를 들었다. 솟구쳐 오르는 젊음 이기도 하였지만 내면으로 숨어드는 순간도 많았기에 ‘쓸쓸히’라는 단어를 품고 심장 한 벽을 드르륵 긁고 지나가는 그의 목소리는 뭐랄까, 뛰어가던 나를 멈춰 세우고는 제자리에 앉게 했다. 김정호란 가수였다. 다음날 학교 마치고 레코드 가게로 가서 김정호 노래를 양면 가득 복사해 달라고 하였다. 토요일 오후에 테이프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커다란 테이프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모든 것을 멈추게 하는 그의 목소리는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겐 짧은 쉼표가 되고 있다. 우울 정도는 아니더라도 무언지 모를 것이 가슴을 누르거나, 격한 감정으로 몸과 마음에 균열이 생길 때, 또는 오늘처럼 서늘함이 밀려오는 순간 그의 목소리는 그런 여러 감정들을 한데 모아서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구원자 역할을 하고 있다.
가을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캠퍼스 잔디위엔 또다시 황금물결
잊을 수 없는 얼굴 얼굴 얼굴 얼굴들
우우우우 꽃이지네 우우우우 가을이가네
하늘엔 조각구름 무정한 세월이여
꽃잎이 떨어지면 젊음도 곧 가겠지
머물 수 없는 시절 시절 시절 우리들의 시절
우우우우 세월이 가네 우우우우 젊음도 가네
우우우우 꽃이 지네 우우우우 가을이 가네
우우우우 세월이 가네 우우우우 젊음도 가네
-김정호 ‘날이 갈수록’-
https://www.youtube.com/watch?v=AuAwr-Xwp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