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살다

짧은 소설

by 대니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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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살다


풀숲에 몸을 뉘었다. 흐릿한 기억들이 햇빛에 타버린 필름 파편처럼 지나갔다. 손가락 마디 끝으로 무언가 빠져나가며 온몸이 나른해지자 눈꺼풀도 서서히 내려앉았다.

환한 햇살에 눈이 부셨다.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낳고 길러준 어머니, 아버지가 있을텐데 도통 기억 나지 않는 것이, 나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거리로 난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방에서 보는 거리는 파스텔 색조의 하얀 햇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바쁜 자동차들은 무엇에 쫓기는지 햇살을 가르며 달려가고 있었다. 나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운동을 그만두며 책상 아래 처박았던 검은색 보스턴백을 꺼냈다. 속옷과 칫솔 치약, 얇은 책 두 권을 넣었다. 어제 신문도 남은 공간에 끼워 넣었다. 문을 밀치고 나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맞은편에는 누군가 떠났는지 묵은 신문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어쩌다 마주치던 옆집 사람도 자고 나면 감쪽같이 사라지고 다음 날이면 파릇파릇한 아이가 웃으며 서 있곤 하였다. 하기야 그 사람들에겐 내가 더 이상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계절이 바뀔 즈음 이면 옆집 아랫집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데 저 이는 매일 저녁 어기적거리고 다니는 모양이 꼭 유령 같다고 수군대는 걸 몇 번이나 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왼쪽으로 몸을 돌려 나가는 순간 후줄근한 녹색 운동복 차림의 김과 부딪힐 뻔했다.


“깜짝이야, 그리 큰 가방 들고 어디 가는 거야?”

“나, 떠나!”

“그게 무슨 말이야?”

“너도 알잖니, 이 건물에 몇 년 동안 남아있는 건 우리 둘이야. 어제도 옆집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어. 바쁜 사정으로 갑자기 이사 가나 보다 생각했어, 그런데 이젠 무서워져. 그래서 나도 여기를 떠나 다른 세상으로 가보려 해.”

“음… 잠시 기다려봐, 나도 같이 가. 그렇지 않아도 밤새 뜬눈으로 버티다가 노루잠 잔 게 몇 달째라, 나도 어디로든 가고 싶다. 짐 싸서 올 테니”

“야, 김!”

김은 벌써 비상계단으로 뛰어 올라갔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꽝’

대포 같은 소리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뛰어 내려온 김은 여전히 녹색 운동복 차림에 연초록의 헐렁한 배낭 하나 메고 있었다.

‘저 녹색들은 뭐야‘

생각이 멈추는 순간

“뭐해, 가자”


눈이 부셨다. 아침나절인데도 따가운 햇살은 볼록렌즈를 지나온 듯 두 발아래 모여 있었다. 먼 산 너머 태양은 서해에서 달려온 황사 때문인지 간유리 통해 보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가볼래?”

김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글쎄, 나오기는 했는데…”

나라고 딱히 갈 데를 정해 놓고 나온 게 아니니 웃고 있는 김과 다를 게 뭐 있겠는가?

“저 앞 정거장에서 제일 먼저 오는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보자, 거기서 어떻게 움직일지 고민해 보자.”

'끼익-'

1004번 버스가 멈췄다. 이른 아침 변두리로 가는 버스 운전석 뒷자리에 기름때 묻은 작업복 입은 사람만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쓱 쳐다보고는 계기판 오른쪽 아래 버튼을 눌렀다.

'치익'

버스 앞문이 닫혀버렸다.

‘그래, 이제 정말 떠나는 거야.'

옆자리 앉은 김은 살짝 웃으며 앞좌석 등받이를 두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김, 그만 두드려.”

두드리는 걸 그만둔 김은 나를 보고 웃었다.

“이렇게 나와 보기는 처음이야. 무섭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지만 혼자가 아니니 괜찮아, 고마워요”.

'나도 당신하고 비슷해, 집 앞 몇 미터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내 삶이었어.'

엔진소리에 맞춰 가슴 안 작은 북이 울리기 시작했다. 박자에 맞춰 발을 가볍게 구르며 생각했다.

‘그래, 할 수 있어, 떠나 보면 ‘나’를 찾을 수 있을 거고, 내가 누군지도 알 수 있을 거야' 초록 배낭을 꼭 껴안고 있던 김은 꾸벅꾸벅 졸더니 내 어깨 쪽으로 머리를 기댔다. 도심으로 달려가는 전조등들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인간들은 한 방향으로 가는 데 익숙한지 몇 번의 정거장이 있었지만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사님, 종점까지 얼마나 남았나요?"

"어디까지, 가게요?"

잠이 덜 깬 듯 까끌까끌한 목소리의 기사는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한번 말했다.

“한 시간 정도 가면 종점인데 가봤자 좋은 것도 없는데, 이 아침에 거길 왜 가는지?"

한 시간 정도 걸린다는 말 뒤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한심하다는 말투는 귓불 근처에서 헤매었다. 상관없었다. 스쳐 가는 가로수를 한참이나 보고 있었더니 나도 덩달아 눈이 감겨 왔다.


‘끼-익’

‘꽝!’

얼얼한 이마를 짚어보니 스멀거리는 액체가 기분 나쁘게 만져졌다. 옆자리 김은 아직도 머리를 박고 있었다.

“눈 떠봐, 무슨 사고 난 것 같아. 일단 여기서 나가자.“

”아, 아야…“

김의 왼쪽 팔을 꽉 잡았더니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눈도 못 뜨는 김을 일으켜 세워 앞쪽으로 걸어 나갔다. 운전석 뒤 작업복을 입고 있던 아저씨 자리는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지만, 흔적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운전석은 텅 비어 있었고 시동도 꺼진 채 핸들 너머 짙은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와 김은 있는 힘 다 짜내서 겨우 앞문 계단을 내려올 수 있었다. 버스는 어떤 충격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운전석에서부터 앞문을 지나 옆면까지 날카롭게 갈라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픈 이마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중얼거렸지만 이해할 수 없는 모양새로 일그러진 버스를 보니 현실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순간, 멀리서 밝은 빛이 달려오더니 순식간에 나와 김 앞에 환한 벽을 쌓았다.

‘이건 분명히 꿈속이야, 꿈인 거야.’

김이 있던 쪽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쭈그려 앉아 있던 그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눈도 뜨지 못하고 앓는 소리 내던 김이 증발해 버린 것이다.

‘분명 꿈이야, 현실이 아냐.’

눈앞까지 다가온 빛의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 손을 뻗은 것은 내가 아니라 빛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그 빛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귓전으로 시원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하늘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선명한 색깔이었고 태양은 눈 부시다 못해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여긴 어디야’

주체할 수 없는 생각들이 밀려드는 순간

‘위잉, 잉잉잉…’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다. 새카만 날파리 같은 것들이 눈앞으로 몰려들었다.

“빨리 피해!"

무리에서 외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파리채 같은 것이 시커먼 무리 속에서 춤을 추었다. ‘치익, 치익, 찌지 직’, 검은 무리는 불꽃을 일으키며 나뭇잎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에잇, 여긴 왜 이리 하루살이들이 많아“

파리채 너머 커다란 그림자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자 뜨거운 스파크가 내 손끝에서 일어났고 정신이 희미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뜬 후 일어나려 해도 움직일 수 없었다.

‘분명 꿈일 거야, 내일 아침이면 이 꿈도 끝날 거야,’

바로 그때 오피스텔 창문 앞 커다란 광고판에서 보았던 거대한 흰색 나이키 운동화가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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