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이제 엄마 칼국수 몬하겄다

by 대니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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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으로 김치 수제비를 먹기로 했다. 스테인리스 그릇에 밀가루를 탈탈 털어 넣고 물을 부었다. 어간장 조금 섞고, 달걀도 하나 풀고, 살살 치대기 시작했다. 폴폴 날리던 가루가 반죽 속에 묻히기 시작하더니 매끈매끈한 타조알처럼 뭉쳤다. 이제는 힘을 쓸 차례. 오른손에 힘을 실어 찍어 눌렀다가 손을 떼고 반으로 접어 다시 누르길 몇 번. 밀가루 반죽이 찰진 고무같이 탄탄해졌다. 비닐로 덮은 반죽은 냉장고에서 숙성의 시간을 보냈다. 잠시 뒤 반죽을 손으로 뜯어 팔팔 끓는 육수에 하나씩 넣기 시작했다. 김장 김치와 호박도 썰어 넣었다. 맵싸하면서도 시원한, 얼큰 수제비를 한입 물었다. 쫄깃쫄깃한 식감의 수제비와 김치를 한입에 넣고 꼭꼭 씹어 삼키니 갑자기 ‘신사동 칼국수’가 떠올랐다.

삼십 년도 지난 일이라 맞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구미 칼국수’ 였을 것이다. 그 칼국수를 먹으려고 학교 앞에서 143번 버스를 타고 응암동을 지나 은평구 신사동까지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칠십이 넘었을 할아버지와 작은 체구에 웃음이 선해 보이던 할머니가 유난히도 반겨 주셨다. 처음엔 데면데면했지만 여자 친구와 몇 번 갔더니 우릴 기억하시고 더 환하게 웃어 주시던 두 분.

“어르신, 맛있는 칼국수 두 그릇 부탁드립니다.”

“학생, 우리 집 칼국수는 이 동네 제일이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로 돌아보며 웃으셨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홍두깨 모양으로 뭉쳐 있는 반죽 덩어리를 꺼내서 칼국수를 해 주셨다. 졸업할 때까지 한 달에 몇 번은 먹으러 갔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몇 달 전 학술대회 참석을 위해 은평구에 있는 병원에 가다 지하철에서 문득 생각났다. ‘은평구’란 단어에 ‘신사동’, ‘칼국수’가 떠올랐다. 이미 돌아가셨을 두 분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어릴 때부터 칼국수를 좋아했다. 기억이 있기 전부터 칼국수며 수제비를 많이 먹어서 일 수도 있고 어머니의 손맛이 워낙 뛰어나서 일 수도 있다. 누런 밀가루 봉투를 뜯어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밀가루를 부을 때부터 침이 고였다. 반죽이 만들어지면 넓적한 도마 같은 것에 올려놓고 홍두깨로 열심히 밀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잘 펴진 반죽을 돌돌 말아 큰 부엌칼로 듬성듬성하게 툭툭 잘랐다. 펄펄 끓는 솥에 칼국수 면을 살살 풀어 넣고 적당한 타이밍에 달걀물도 흩뿌려 넣었다. 새끼손가락 반만 한 굵기의 면이 맛있게 익으면 어머니는 노르스름하고 걸쭉한 국물과 칼국수 면을 갈비탕 그릇에 가득 퍼주셨다. 젓가락으로 감아올려 후후 불어 입 안에 넣으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별 세 개 짜리 미쉐린 식당이 바로 그곳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길가에 칼국수 가게가 보이면 꼭 들어가야 했다. 어머니의 칼국수가 그리웠다. 번번이 실망해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해주시던 칼국수를 대신할 칼국수는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병원 일이 바빠 고향에 자주 갈 수 없었다. 설, 추석이 한참 지나서야 내려가 어머니 손을 잡으면 어머니는 칼국수를 제일 먼저 끓여 주셨다.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한 그 날. 어머니는 칼국수 그릇을 내 앞으로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여셨다.

“아들, 이제 엄마 힘들어서 칼국수 몬하겄다. 반죽하는 것도 힘들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없던 시절에 수제비, 칼국수를 하도 많이 해 먹여서, 그때 생각나서 힘들기도 하고.”

그날 이후 어머니는 칼국수를 만들지 않았다. 나도 더는 조르지 않았다.

아내와 같이 먹었던, 이제는 다시 갈 수 없는 ‘신사동 칼국수’집과 마음 한구석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으로 나부끼는 칼국수 가락들이 김치 수제비 몇 숟가락에 함께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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