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은 가고 고소공포증만 남았다

by 대니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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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담장 가에 핀 연분홍 코스모스 한 송이를 누가 볼세라 꺾어 들었다. 버스로 이십 분이면 닿는 집을 걸어가기로 했다. 파란 하늘 넘실대며 어디론가 가고 있는 구름 한 조각에 눈길 싣고 걷는 열여덟 청춘의 발걸음. 사뿐사뿐 걷다 보니 어느새 ‘구름다리’에 도착했다. 동양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도시 통영과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가 있는 미륵섬을 연결하는 운하교인 ‘충무교’를 통영 사람들은 ‘구름다리’라 불렀다. 높지 않은 아치형 다리를 멀리서 보면 뭐랄까, 저 너머 피안의 세계로 데려다 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리 불렀을까?

150m 정도 되는 다리의 정점에 멈춰 섰다. 강구안 앞바다에는 누군가 일부러 떨궈 놓은 듯 작고 예쁜 공주섬이 있고 그 옆으로 고깃배 몇이 포말을 일으키며 항구로 들어서는 아름다운 남도의 풍경. 설레는 마음에 청춘은 준비해 온 코스모스 꽃잎을 다리 난간 너머 날려 보냈다. 선선한 바람 따라 나풀거리며 파란 바다 향해 헤엄쳐 가는 연분홍 코스모스 잎. 코스모스 꽃잎처럼 지나간 푸른 시절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선 그 길을 걷지 않았다. 어쩌다 구름다리를 지나가더라도 자동차 안에서 다리 입구에 서 있는 꽃나무며 다리 너머 보이는 푸른 바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늘은 그 다리를 걷기로 했다. 다리 초입에 서 있는 수많은 벚나무는 무성한 꽃잎을 피워내고는 봄바람에 자글자글한 이파리들을 지나가는 사람들 머리며 스쳐 가는 차창으로 뿌려댔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연한 흰색과 분홍 꽃잎들에 내 마음도 한껏 부풀었다. 하늘하늘 걷다 보니 어느새 ‘구름다리’에 닿았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코스모스는 보이지 않아 가로수로 심어 놓은 홍가시나무의 붉은 이파리 몇을 움켜쥐었다. ‘그래 이거라도 날려보자.’


낭랑 십팔 세의 기분은 아니더라도 그때의 감성은 얼마쯤 돌아오리라 기대했다. 구름다리 입구를 지나 몇 걸음 내디딘 순간, 어디서 바람이 그리 불어오는지 쓰고 있던 모자가 날아갈 뻔했다. 서둘러 모자를 부여잡고 또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다리의 정점까지는 삼십여 미터. 그런데 갑자기 다리가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른발을 들려 해도 왼발을 달싹거리려 해도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두 다리. 조금만 더 가면 푸른 시절 그 코스모스처럼 멋들어지게 날려볼 수 있는데. 다리 아래 까마득하게 보이는 짙푸른 파도는 바람을 맞아 더욱 거칠게 넘실대고 있었다.

얼어붙은 두 다리는 저 아래 보이는 짙푸르고 시커멓게 보이는 파도 때문인가? 무엇이 되었든 나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들고 있던 홍가시나무 이파리 몇을 휙 던졌더니 바다로 날아가기는커녕 내 코앞으로 돌아왔다. 나도 돌아서서 구름다리를 벗어났다. 조금만 더 가면 구름다리 꼭대기에 설 수 있었을 텐데. 그 시절 열여덟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고소공포증에라도 걸린 듯 움직이지 않는 두 다리, 내 마음을 지금 어찌할 수 없는걸. 바람 없는 고요한 날에 다시 서 보겠노라. 마음속 깊이 다짐하고서 벚꽃 터널을 지나왔다. 영화 속 타임슬립이 일어나는 터널을 지나온 듯 벚꽃 무심히 날리는 길을 지나오니 바람도 잠잠해졌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돌이켜 볼 수 없는 아스라한 기억을 찾으려 하지 말고 마음속 깊은 곳, 손닿지 않는 곳에 모셔두라는 자연의 계시처럼.


고소공포증(acrophobia)은 나이 들면서 생기거나 악화할 수 있다는 연구가 있었다. 킹스칼리지 런던 정신의학연구소 케빈 구르네(Kevin Gournay) 박사는 2014년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나이 들면서 자기 신체가 매우 약해졌다고 느끼는 경향이 강화되고 ‘추락’에 대한 공포가 심해지며 이것이 고소공포증의 심화로 이어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면으로 맞서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악화하거나 절대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맞서는 방법 중 대표적인 것이 체계적 탈감작(systemic desensitization)인데, 불안을 일으키는 요소 중 약한 것부터 시작하여 점차 강한 자극에 반복 노출하는 훈련을 통해 공포 반응을 점차 줄여가는 기법이다.

아드레날린이 육신을 지배하던 그 시절은 아무리 높은 곳에 올랐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과 더불어 자연스레 찾아온 호르몬의 변화에 적응해야 할 나이. 공자가 얘기한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하늘의 명’을 받아들여야 할 때인가 보다. 하지만 탈감작으로 나이 들어감을 어느 정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것이 과학으로 밝혀진 것이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 테다.

열여덟의 낭만을 찾으려다 갑작스레 만난 ‘고소공포증’. 내일, 또 내일을 보내고 저 다리 위에 서서 하얀 코스모스 꽃잎 하나 날려보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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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다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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