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사 올라가는 길목, 다른 세계로 연결되는 듯한 좁은 숲길을 걸어 닿았다. 까까머리 아이들이 뛰어놀던, 몇백 명 되는 아이들이 모여 있어도 좁아 보이지 않던 그곳. 경사지고 야트막한 언덕배기 같은 띠밭등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좁았다.
호루라기 울리면 그 많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나무 사이며 바위 아래에서 사각으로 접은 종이를 찾아냈다. 셋이 달리면 3등하고 넷이 달리면 4등 하던 나로선 친구들의 재빠른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나는 보물찾기 하던 소풍 몇 년 동안 한 번도 보물을 찾지 못했다.
그 넓었던 띠밭등 앞에 섰다. 작은 잔디 광장에서 뛰어놀던 기억을 되돌려 보았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보물은 못 찾았어도 삶은 달걀 한 입 킨사이다 한 모금에 행복해하는 아이가 서 있었다. 흑백 필름이 차르르 소리 내며 돌아갔다. 영사기 필름이 다 돌아갈 때까지 띠밭등에 서서 녹색 감도는 잔디밭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찌르르르. 새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편백 숲길 가득한 서늘한 상쾌함에 온몸을 맡긴 채 통영 미륵산 정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길 잃지 말라며 한 번씩 울어주는 작은 산새들, 나뭇가지에 화살표처럼 묶여 있는 산악회 이름표 따라 한 걸음씩 고도를 높여 나갔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 보다 한 걸음에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고도를 만날 수 있는 충실한 이 발걸음. 이마에 땀방울 가득하고 등허리가 축축해질 때쯤 정상 가까이 나무 데크가 보였다. 큰 숨 내쉬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눈앞에 화려하게 꽃피운 벚나무를 만났다. 450m 아래의 벚나무들은 꽃잎 다 떨어내고 푸르른 이파리들이 자리 잡았는데.
아, 잠시 뒤 나는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연분홍 화사한 꽃잎 아래 잔뜩 흩뿌려져 있는 연분홍들. 산산이 부서진, 어제는 나무에, 나뭇가지에 붙어서 숨 쉬었을 꽃잎들. 그네들은 오지 않는 무엇을 기다리다 지쳐 쓰러졌을까? 괜스레 드는 비감한 느낌을 한달음에 떨쳐내고 461m 미륵산 정상에 올랐다. 누런 미세먼지 가득한 먼 하늘 뒤, 희뿌연 그림처럼 서 있는 남도의 작은 섬들에 손 흔들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돌아섰다. 누군가 한 사람에서 시작되었을 돌탑 앞에 멈춰 서서 두 손 모았다. 어떤 열망이나 갈구 때문은 아니었다. 산꼭대기에서 숱한 세월 존재해 온 벚나무, 그 가지에 매달린 지지 않은 벚꽃, 그리고 땅바닥에 떨어져 흩어진 벚꽃이 떠올랐다. 매달린 꽃잎 보다 해지면 불어오는 찬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갈, 어제는 생명의 일부였을 꽃잎에 마음이 흔들려서였다. 돌탑 한편에 쓸쓸한 마음 하나 얹어 놓고 선선한 산길을 걸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떠도는 것이다. 떠돌면서 사람은 자기라는 인간을 체험한다.’ 니체의 말이 아니더라도 삶은 ‘죽음’이란 목적지가 정해진 고달픈 여정에서, 기다려도 오지 않는 무엇과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찾아 헤매고 떠도는 것이 아닐까?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는 유토피아 대신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이상향이자 피난처인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의 개념을 얘기했다. 질서정연한 과학적 사고가 머릿속에 들어차 있는 나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지만 용어 자체는 무척 흥미로웠다.
의학용어이기도 한 Heterotopia는 서로 다르다는 뜻의 접두어인 heteros와 장소를 뜻하는 topos가 합쳐진 단어다. 의학 사전에 이소성(異所性)으로 번역되어 있다. 뇌(Brain)의 A 구역에만 존재해야 하는 조직(tissue)이 B라는 다른 부위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선천적 기형의 한 종류이다. 아이러니하다. 과학에서는 문제아 취급받는 단어가 문학과 철학에서는 일상의 언어와 공간을 비틀어 새로운 관념을 제시하는 ‘낯설게하기’나 일상을 벗어나 일종의 해방구 역할을 하는 단어가 되어 추앙받는 위치에 올라가 있으니 말이다.
같은 사물로 같은 공간에 있지만 너무나 다른 처지인 벚꽃잎을 보니 감성에 젖은 생각들이 밀려왔다. 아무렴 어떤가. 평소 귓속 가득 울리던 음악을 끄고 일상에 마음 열고 걷다 보니 의도하지 않게 낯선 공간과 마주쳤다. 그것만으로 의미 있는 걸음 아니었을까.
숨 가쁜 걸음 끝에 빛나던 꽃잎들을 만났다. 보석 같았다. 찾지 못했던 흑백 필름 안 보물들을 나의 heterotopia에 다시 숨겨 두고 기쁜 산길을 내려왔다.
넓었던 띠밭등
쌓여있는 소망들
Heterotopia는 어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