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익 소설집 『꽃신』(남해의봄날, 2018)
6‧25전쟁을 피해 피난 온 사람들로 가득한 부산의 한 공간에서 마주친 꽃신. 상도에게 꽃신은 아픔과 슬픔 그 자체였다. 전쟁 전 상도는 꽃신 만드는 옆집 처녀에게 청혼했었다.
“따님한테 장가들겠소!”(p.11)
꽃신 만드는 신집사람은 늘 그에게 “네가 커서 장가들 때에는 너하고 너의 신부, 중매쟁이를 위해 제일 예쁜 꽃신을 만들어 줄게.”라고 했었다. 생애의 찬란한 순간을 기대하며 발소리를 기다렸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아픔뿐이었다.
“내 딸을 백정네 집 자식에겐 안 주어!”(p.19)
그 말에 분노한 젊은이는 자기도 모르게 손에 백정 칼을 쥐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칼을 빼앗았다.
“너는 손톱을 갖고도 남을 해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 우리 백정을 어떻게 생각하겠니.”(p.19)
갈퀴로 긁는 것같이 아픈 심장,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쓰라림이라는 생각에 땅을 치고 우는 아들을 아버지는 부산 쇠고기 시장에 있는 삼촌에게 보냈다.
내 마음은 언제나 어렸을 때 신집일방에서 꿈꾸던 아름다운 꽃신 곁에 머물고 있었다.(p.21)
상도는 신집 처녀가 신고 다니던 꽃신을 늘 마음에 품고 다녔다. 부산의 피란 시장에서 꽃신을 마주쳤을 때 원한 가득 찬 감정이 타올랐지만, 그곳에 신집 노인은 없었다. 좌판 앞에는 꽃신과 신집 부인만 있을 뿐이었다. 죽은 신집 노인 대신 꽃신을 파는 신집 부인, 흥정하는 양복 입은 사내. 그 모습을 본 상도는 호주머니에서 돈을 다 꺼내 놓고 외쳤다.
“여기 있소. 이 꽃신은 내겁니다.”(p.25)
“그 애는 죽었다. 그 애는 지난여름 폭격에 죽었다.”
아아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래전 내 예감은 그녀의 죽음을.(p.28)
상도는 신집 부인이 내미는 꽃신 꾸러미를 거절하며 얘기했다.
“따님을 위해 이 꽃신을 가지세요.”
그녀는 이 꽃신을 가지게 될까. 다만 그녀가 어느 곳에 있건 꽃신을 받아주었으면 싶었다. (p.27)
짧은 소설을 덮었다.
어릴 적 손 닿으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던 무지개 따라 얕은 개울 건너 바닷가로 뛰었던 아득한 감정과 다 외우지 못했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It was many and many a year ago,
In a kingdom by the sea
…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 『검은 고양이』, 『황금충』, 『도둑맞은 편지』 등의 작품으로 현대 추리소설의 선구자로 알려진 Adgar Allan Poe의 시 「Annabel Lee」이다. 고백하건대 고등학생 때는 그가 시를 썼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우연히 들른 레코드 가게에서 울려 퍼지던 감미로운 시. 무엇인지 물었더니 Jim Reeves란 가수가 낭송하는 ‘애너벨 리’라고 했다. Poe의 사촌 동생이자 아내였던 버지니아 클램이 죽고 나서 비통함을 표현한 시. 그 LP를 구해서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곤 ‘It was many and many years ago…’를 한동안 외우고 다녔다. 아내가 죽고 2년 뒤 그도 마흔의 나이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But our love it was stronger by far than the love
Of those who were older than we —
Of many far wiser than we —
And neither the angels in heaven above,
Nor the demons down under the sea,
Can ever dissever my soul from the soul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하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훨씬 강한 것
우리보다 나이 먹은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우리보다 현명한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그래서 천상의 천사들도
바다 밑 악마들도
내 영혼을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으로부터 떼어내지는 못했네.
<Adgar Allan Poe, 「Annabel Lee」 중>
1894년 갑오개혁으로 500년 지속된 조선의 신분제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그 세월 동안 각인되어 내려온 망령 같은 유전자는 젊은 청년의 가슴에 갈퀴 같은 상처를 남겼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렸기에 시장통 좌판에서 만난 꽃신을 그냥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으로 갈라진 두 사랑의 이야기. 「꽃신」과 「Annabell Lee」는 어쩌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아픔을 얘기하고 있기에 시대와 공간을 넘어 내게 닿은 것이 아닐까?
지금 저 판자 위에 꽃신 다섯 켤레만이 피난민으로 가득 찬 시장의 공허를 담고 있다. 그것이 다 팔려 나가기 전, 한 켤레 신발을 위해 돈주머니를 다 털어 버리고 싶지만 결혼 신발 아닌 슬픔을 사지나 않을까 두렵다.
-p.7
이번 주말엔 작가의 생가가 있는 통영으로 그가 남긴 꽃신을 보러 가야겠다.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한 소설 꽃신은 『The Wedding Shoes』로 1956년 미국 잡지 Harper's BAZZAR에 먼저 발표되었다. 그리고 1963년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해외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극찬을 받았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