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을 보고 낙엽에 눈물 짓다

by 대니보이


올봄부터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느라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수업과 매일 쌓이는 과제로 지쳐 있는 아내는 밝은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집에 올 때쯤이면 당이 떨어진 것인지 하루의 기운을 다 사용해서 녹다운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할 수 없이 늘어져 눈동자가 흐릿해지는데 때맞춰 차려진 저녁은

새로운 하루를 주는 선물이 된다.


팔 구월 무렵까지 산책코스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파트 단지 주변을 둘러서 오는 삼 킬로 미터 거리였는데 시월이 넘어가면 해도 일찍 떨어지기도 하고 쌀쌀해져서 멀리 가지는 못해 가까운 중학교 앞에서 길을 건너 동네 뒤편 하천변을 따라 걷는 약 이 킬로미터 코스를 선택하여 머릿속 가득한 일들을 초기화시키고 집으로 돌아간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단풍이 어디까지 들었네, 내장산 단풍이 어떠네 하는 이야기가 들리면

괜스레 아내 눈치를 보게 된다.

몇 해 전부터 내장산 단풍을 꼭 보고 싶다고 얘기하는 아내에게 올해는 정읍 어디쯤을 거쳐

내장산 색색의 단풍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돌아보자고 한 게 몇 번째인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약속을 못 지킨 미안한 남편이 되어 버렸다.


아내가 살짝 웃으며 건네주는 커피를 마시고 가볍게 차려입고 나섰더니 싸늘한 기운이 얼굴 한가득 와닿았다. 서울은 벌써 눈이 내렸다고 딸아이가 전화했었는데 남쪽 바닷가 근처는 눈 대신 어둑어둑한 밤기운에 얹혀온 찬바람이 겨울이 코앞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단풍은 일기예보의 기후선 넘어 얘기인 줄 알았는데 가로등 옆에 서 있는 은행나무 가지에는 밤하늘 별보다

더 촘촘한 샛노란 이파리들이 매달려 있었다.

흰 도화지 위에 여백 없이 빽빽하게 들어선 진노랑.


노랗다는 한 단어로는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노란 황금빛 색깔의 파도가 눈앞까지 확 밀려와

놀람과 감동으로 한참을 올려보다 오른쪽에 서 있는 단풍나무를 보았다.

어떻게 오늘에서야 보았을까?


키도 그리 크지 않은 아기단풍 나무에 열린 진홍의 여린 손가락들이 노란 가로등 빛을 배경으로

공간 가득 양각 陽刻되어 있었다.

"내장산 단풍 보러 가지 않아도 되겠네."

쓸데없는 한마디에 옆구리 한번 찔리고 나서야 노랑, 빨강의 미술관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한 두어 걸음 옮겼을까 눈 주변 근육까지 물러져 시도 때도 없이 눈물 나올 나이가 아닌데도

갑자기 눈 끝에서 물기가 찔끔 흘렀다.

떨어져 밟히고 있는 노랑 빨강 낙엽 때문만은 아니었을 텐데,

짧디짧은 절정의 순간이 허무하게 바람결에 날아가 버린 안타까움 탓도 아닐 텐데.


사전에는 낙엽에 대해 ‘식물이 일 년 동안 열심히 살아온 날들을 마무리하고 닥쳐올 고난의 겨울을 무사히

잘 넘기기 위한 철저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라고 되어있다.

낙엽 하나는 오늘이 아프겠지만 떨어진 그 자리는 코르크 조직이 발달하여

상처받은 조직을 치유해 준다고 한다.

저 밑동 두꺼운 나무는 그래서 내년에는 더 붉은 더 노란 이파리들을 보여 줄 것이다.


낙엽을 태우면서 ‘가을은 생활의 계절이다.’라고 담담하게 얘기하며 오늘을 살았던 이효석 선생이나

‘우리들 모두가 떨어진다. 이 손이 떨어진다. 보라, 다른 것들을. 모두가 떨어진다.’란 시구절로

감상에 들게 하였던 릴케도 같은 계절을 보았고 살다가 갔다.


절정의 순간을 지나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걷더라도 지금,

빨강 노랑의 단풍이 있어 행복한 가을,

내년엔 내장산에서 이 단풍을 즐겨야겠다.




가을


나뭇잎이 진다. 멀리에선 듯 잎이 진다.

하늘의 먼 정원들이 시들어 버린 듯이.

부정하는 몸짓으로 잎이 진다.


그리고 깊은 밤에는 무거운 지구가

다른 별들에서 떨어져 고독에 잠긴다.


우리들 모두가 떨어진다. 이 손이 떨어진다.

보라, 다른 것들을. 모두가 떨어진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있어, 이 낙하를

한없이 너그러이 두 손에 받아들인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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