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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니보이 Dec 04. 2023

그와 함께 걷는 어떤 날


   밤 열시.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시원한 밤공기 맞고 낙엽 밟으며 학교를 나섰다. 어떤 날은 버스 타고, 청춘의 뜨거운 가슴 끓어오르는 어떤 날은 한 시간 남짓 걸어 집에 갔다. 버스 타고 떠나는 친구에게 손 흔든 뒤 그의 노래 흥얼거리며 닿은 통영 해저터널은 깜깜한 동굴 같다. 사뿐한 발걸음에 맞춰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아득한 그의 노랫말이 너무 좋았다.

  시조 시인 ‘초정 김상옥' 거리로 불리는 오행당 골목 안. 지구레코드, 명성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온 음악들로 가득한 그곳에서도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제는 퇴색한 골목. 그 시절 흔적들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명성 레코드사만이 골목 안에 살아남아 흐릿한 세월을 붙잡고 있다.

   삼십 년 전 그곳에서 조동진 LP를 샀다. 그의 노래를 밤새 듣던 십 대의 나날들. 대학생이 되면서 그 좁은 하숙방에 무슨 정신으로 LP 들을 쌓아 두었는지 모르겠다. 작은 보물이었거나 청춘의 향수쯤 되었던 걸까. 아무튼. 아득한 그의 목소리는 발바닥이 지면에서 0.1mm 떠다니던 그 시절의 나를 언제나 낭만이란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그를 다시 만난 곳은 20년 전인 2004년 LG아트센터 공연장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간직했던 그의 LP를 들고 갔다. 혹시라도 공연이 끝나면 무대로 내려가 사인을 받을 요량으로. 그렇지만 내가 앉은 자리는 무대에서 가장 멀었다. 그의 얼굴 윤곽만 볼 수 있었고 무대 앞으로 갈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청춘, 낭만 그리고 그리움으로 공간을 가득 채운 그의 목소리 그것만으로도 나는 high였다. 그의 이름을 새기지 못한 LP판을 도로 가지고 오면서 마음먹었다. 다음 콘서트는 꼭 도전해 보리라. 하지만 그날이 그의 마지막 단독 콘서트였다. 얼마 뒤 서울을 떠나 살게 된 나는 그의 베스트 CD를 듣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시대의 음유시인 조동진. 그는 2017년 8월 28일, 공연 19일을 앞두고 포스터만 남겨놓은 채 방광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십 대의 젊음에서부터 사십 중년이 될 때까지 곁에서 위로와 평안을 주었던 그와 이별한 날,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 없었다.

   찬 바람 부는 저녁 산책길. 반은 떨어지고 절반은 붙들려 있는 나무 이파리를 보고 있으면 그의 노랫말이 절로 몸속에서 꿈틀대다 낙엽 곁에 떨궈진다. 노랗게 빨갛게 물든 나뭇잎과 그 위로 쏟아지는 하얀 가로등 불빛을 따라 걸었다. 바스락, 바스락. 낙엽 소리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은 목소리로 나도 같이 그를 따라 불렀다. 벌판을 넘어 강변까지 아니면 강변을 지나 저 먼 곳으로. 그와 함께 걷는 쓸쓸한 어떤 날이다.     


   쓸쓸한 날엔

   벌판으로 나가자     


   아주 매 쓸쓸한 날엔

   벌판을 넘어서

   강변까지 나가자     

   

   갈잎은 바람에

   쑥대머리 날리고     


   강물을 거슬러

   조그만 물고기 떼

   헤엄치고 있을 게다     


   버려진 아름다운 이

   몸을 부벼 외로이

   모여 있는 곳     


   아직도 채

   눈물 그치지 않거든

   벌판을 넘어서 강변까지 나가자.     

   _허영자 詩, 조동진 노래 ‘어떤 날’


https://www.youtube.com/watch?v=1l5CUXrB7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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