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그리고 산미구엘

by 대니보이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 기형도


조금은 한가한 화요일 야간 근무
사무실에 꽂혀 있던 시집 한 권
서른 나이로 요절한 젊은 시인.

심야 극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스러져간 시인의 죽음도 안타까웠지만

대학시절 시집 속의 빈집을 읽으며 느꼈던 아스라한 감정이 떠올라
근처 맥주집으로 몸을 돌렸습니다.
희미한 불빛,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예전 어느 대학교의 학생 실습선에

동행하게 되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싱가폴을 거쳐

십이일 정도 걸려 도착한 필리핀 마닐라항.

땅을 밟았더니 배에서 보다 더 흔들리는 육지의 멀미에
시원하게 마셨던 산미구엘 맥주.

쌉쌀하면서도 어지럼증을 가라앉혀 주었던 그 맛이 기억나는 건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요.


텅 빈 다방 구석자리
숨죽여 앉았네
손짓하며 달려가던 널
한 울음으로 움켜쥐었네
소리 없이 스러지는
모래알로 너는 떠나갔네.

역시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집니다.'

맥주.jpg

'입속의 검은 잎' 그리고 산미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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