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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니보이 Apr 18. 2024

성홍열과 독성쇼크증후군

   진료실 책상 위 전화벨이 울렸다. 병동 간호사의 전화였다. 어제 입원한 아홉 살 K가 열이 안 떨어지고 발진도 심하여 보호자가 봐달라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올라갈게요.” 

   조금 전 진료실을 나간 아이도 심한 고열에 기운 없이 늘어져 수액과 혈액검사를 처치했는데 어제 입원한 K도 그랬다. 병실로 들어섰더니 머리 희끗희끗한 할머니가 늘어져 있는 손주의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누워있는 K의 몸통엔 어제 보이지 않던 다양한 발진이 퍼져있었다. 힘없이 벌린 K의 입안 뒤쪽 연구개 부위에도 자잘한 발진들이 보였고 혀도 빨긋하게 오돌토돌 올라온 점막들이 딸기처럼 보였다. 

   “GAS 신속항원검사 나가고 throat culture 나가봅시다.” 

   성홍열이 의심되었다. 한자로는 猩紅熱인데 성홍(猩紅)은 ‘오랑우탄의 털빛처럼 검붉게 짙은 빛깔’을 뜻한다. 영어로는 진홍색을 뜻하는 scarlet과 열을 나타내는 fever를 합쳐 Scarlet fever라고 부른다. 병명에 떡하니 올라갈 정도로 특징적인 발진 상태를 보이는 성홍열은 A형 연쇄상구균(Group A Streptococcus, GAS)이 원인균이다. 주로 6~12세 아이들이 잘 걸리며 K와 같은 증상들이 특징적이다. 페니실린계 항생제를 10일 정도 사용하면 대부분 완치된다. 하지만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거나 불충분하게 사용한다면 폐렴이 동반되거나 심근염(myocarditis) 등을 일으키는 류마티스 열(rheumatic fever)로 진행되어 좋지 않은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원장님 GAS positive입니다.” 

   정확한 진단은 인두 배양검사에서 균이 확인되어야겠지만 임상 증상과 신속항원검사에서 양성이니 99.9% 성홍열이다. 다행인 건 경험적으로 K에게 입원할 때부터 페니실린계 항생제를 사용해서 별다른 일 없으면 합병증이나 후유증 없이 치료될 것이다. 

   “어르신, K가 성홍열입니다. 원인균 잡는 항생제 쓰고 있으니 좋아질 겁니다.”

   고맙다고 고개 숙이는 어르신에게 인사하며 돌아서 나오려다 한 말씀 더 드렸다. 

   “어르신, 성홍열 옮으면 큰일납니다. 마스크 잘하시고 빨리 연락해서 보호자 바꾸셔야 합니다.”

   일본에 ‘독성쇼크증후군’(STSS, Streptococcal toxic shock syndrome) 환자가 빠르게 늘고 있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2023년 7월부터 12월까지 50세 미만 환자는 총 65명이 감염됐고, 이 중 21명이 패혈성 쇼크와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해 치사율 30%가 넘는다는 기사였다. 이 질환의 원인균이 성홍열을 일으키는 A형 연쇄상구균이다. 

   인후통과 발열, 발진 등으로 아이들을 고생시키지만, 좋은 항생제 덕분에 대부분은 별 탈 없이 감기처럼 지나간다. 하지만 30세 이상 특히 면역체계가 좋지 않은 경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열감기로 시작해서 폐렴으로 진행되거나 조직 괴사나 장기부전 등으로 이어지는 독성쇼크증후군으로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성홍열과 독성쇼크증후군. 익숙하지 않은 병명이지만 ‘작은 아씨들’이란 소설 또는 영화 제목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868년 미국 남북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 루이자 메이 올컷의 소설로 마치가 네 자매의 가족사가 애니메이션과 영화로 여러 번 만들어졌다. 

   네 자매 중 피아노를 잘 쳤던 셋째 베스가 열병을 앓다가 죽는데 그 아이를 죽게 한 병이 성홍열이다. 항생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합병증 중 하나인 폐렴이나 심근염으로 죽었을 것이다. 영국 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최초로 발견한 것이 소설 배경보다 60년 뒤인 1928년 9월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성홍열이나 세균감염으로 안타까운 목숨을 잃었을지. 하지만 의학이 발전한 현대에도 A형 연쇄상구균 감염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일 년에 50만 명 이상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홍열에 걸린 손주 보느라 아픈 기색 완연한 어르신이 균이 옮아 상태가 안 좋아진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K의 할머니가 손주가 걸린 성홍열도 일본을 혼란스럽게 하는 독성쇼크증후군도 비켜 나가길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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