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뜨거.” 뒤쪽 세면대에서 비명이 들렸다. “뜨거운 물이 나와서 데일뻔했네.” 한 어르신이 온탕의 수도꼭지를 잠근 나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째려보며 말했다. 탕 안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도 한 말씀 거들었다. “탕 수도꼭지를 갑자기 잠그면 뜨거운 물이 나와요.” 당황스러웠다.
일의 자초지종은 이랬다. 저녁 먹고 아파트 지하 목욕탕에 들렀다. 초저녁이라 그런지 동네 목욕탕 주인인 초등학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샤워하고 온탕에 들어가려는 순간 기둥에 붙은 온도계가 눈에 들어왔다. 42도, 나의 한계는 40도였다. 1도만 더 올라가도 엄지발가락 넣는 순간 온몸이 불에 덴 듯 뜨거워 딱 40도까지 견뎌낼 수 있었다.
탕 입구 왼쪽엔 빨간 파란색 레버와 수동으로 조작 가능하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파란색 레버를 힘껏 밀어 찬물을 섞기 시작했다. 탕 안에 앉은 두 어르신은 나를 흘깃 쳐다보곤 눈을 감았다. 1분 정도 찬물을 흘려보낸 뒤 손으로 휘휘 저었다. 온도가 조금 내려가길래 파란 레버를 당겨 찬물을 멈췄다. 그 순간 비명이 울린 것이다.
“몰랐습니다. 괜찮으세요?”
“다음엔 물 잠글 땐 뜨거운 물 나온다고 얘기하면 돼요.”
그분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찬물을 열었다가 잠그면 순간적으로 뜨거운 물이 나온다는 것을. 잠시 탕에 앉아 있다 목욕탕을 나와 접수대에 계신 분께 말씀드렸다. 어린아이들이 화상 입을 수도 있으니 안내판 하나 붙이면 어떻겠냐고 했다.
“아, 뜨거운 물이 그렇게 한 번씩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아이들이 다칠 수도 있겠다는 나의 말에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목욕탕 안에 계시던 분들은 나도 알겠거니 생각했을 것이다. 이해는 되지만 뜨거운 물세례 잠시 받고 놀랐을 그 분을 생각하니 괜스레 죄송했다.
한편으론 그런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경고문 하나 붙이지 않고 수리도 하지 않은 채 운영해 온 관리 주체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사고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저녁 시간대면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로 가득한 목욕탕에서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시민의 안전과 관련된 법이나 규칙들은 대부분 커다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제정되었다.
1942년 11월 28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코코넛 그루브 나이트클럽’에서 492명이 사망하고 130명이 다친 화재가 있었다. 유독가스에 의해 질식사한 사람도 많았지만, 회전문 때문에 대피가 힘들어 피신할 수 있었던 300여 명이 죽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생존자들의 증언과 회전문 앞에 쌓인 희생자들의 시신을 계기로 회전문 양옆에 일반 출입문을 반드시 설치해야 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500명 가까운 목숨이 희생되고 나서였다.
이 규정은 현재 전 세계에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런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 사람이 죽은 뒤에 약을 짓는다는 뜻으로 일을 그르친 뒤에 아무리 뉘우쳐야 이미 늦었다는 말 - 이 죽은 이들에게 어떤 위로가 될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들의 목숨값으로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라도 만들어져 다음 오백 명 그다음 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된 것이 그나마 그들의 희생에 작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목욕탕 파란 레버를 당긴 나의 행동에 뜨거운 물세례 받은 이가 다치지 않았음에 감사하다. 다음번엔 주의하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기를. 아니 파란 레버를 당겨도 뜨거운 물이 쏟아지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