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레코드
10월, 가을바람 선선히 머리카락 흔들어야 할 계절이지만 열두 시 한낮에 내리쬐는 따가운 햇살에 선글라스를 고쳐 쓰고 통영 항남일번가로 들어섰다. 초등학교 때는 이 골목에 들어설 일이 없었지만, 중학교에 다니고부터 익숙해진 골목이다. 간선도로에서 한 블록 안에 숨겨진 보석 같은 곳. 영화 ‘해리포터’의 다이아건 앨리(Diagon Alley)처럼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한 거리였다. 떡볶이에다 우동이 맛있는 분식집도 있었다. 항남일번가란 생소한 이름 대신 ‘오행당 골목’으로 불렸던 통영의 화양연화 가득했던 청춘의 골목. 주말이면 부딪힐 듯 스쳐 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던 그곳을 무언가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며 한 걸음 내디딘다.
텅 빈 거리. 가게 유리창에 붙은 ‘임대문의’ 안내판들. 왁자지껄했던 그 시절을 내가 지나왔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삼사십 년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듬성듬성해진 내 머리칼같이 휑해진 골목을 걷는 순간, 행진곡풍 음악이 내 걸음을 살며시 골목 안으로 이끌었다. 사뿐사뿐 내디딘 발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십 대 시절, 이 골목은 나에게 충무도서, 지구레코드 그리고 명성레코드로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구도심이란 이름으로 뒷방 노인 신세가 되어버린 이 골목엔 모래바람 가득한 사막 한가운데 잠시 반짝했던 신기루처럼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한군데 빼고는 말이다.
사막 안 숨겨진 우물 같은 곳, 신기루 넘어 오아시스로 존재하는 ‘명성레코드’. 위치가 몇 번 바뀌긴 했지만, 사십 년째 이곳에서 살아내고 있다. 노래를 듣기 시작한 중학교 이후 음악 하면 늘 첫 번째로 인상되는 내 마음속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섰다. LP는 CD로 대체 되었고 음악가 이미지를 풍기던 젊은 주인의 얼굴엔 익숙한 세월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의 인사에 반갑게 맞아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이곳에서 사십 년을 버텨내고 살아온 그분 인생 내공이 느껴졌다. 이런저런 말끝에 기타를 배우고 있어서 기타 연주곡을 듣고 싶다고 했더니 앨범 하나를 건네주었다. CD를 만지작거리며 “배우기 전엔 몰랐는데 기타는 참 어려운 악기예요.”라는 나의 중얼거림에 “기타는 어렵게 배워야 오래 가요,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 보세요.”라고 답하셨다. 그러게 어디 기타뿐이겠는가?
CD 값을 계산한 뒤 같이 사진 찍자는 나의 무례한 부탁에 ‘원래 안 찍지만…’ 하면서도 곁을 내주셨다. 스물여섯 나이에 레코드 가게를 시작하고 사십 년 동안 업을 계속해 오고 있다는 그의 웃음에 가게 안이 따뜻해졌다.
한자리에 꿋꿋이 발 딛고 서 있기 어려운 것이 인생 아닌가. 알 수 없는 충만함을 안고 레코드 가게를 빠져나왔다. 사람 하나 없는 골목길엔 바람결 흩뿌리고 명성레코드에서 따라 나온 노랫소리는 뱃고동처럼 가슴을 울린다. 아, 가을 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