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_진료실에서 챗지피티

3부_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내일이 되길

by 대니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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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을 들어서자마자 여섯 살 아이는 밭은기침을 토해냈다. 시뻘건 얼굴로 속에 들러붙은 가래를 뱉어내고서야 옅은 숨을 내쉬었다. 39도를 오르내리는 고열에 지친 아이는 퀭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디가 아파서 왔니?” 내 물음에 아이는 “yoc il loo di…”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옆에 선 금발의 엄마에게 눈을 돌리자, 그녀는 자신의 스마트폰에 무언가 빠르게 말을 쏟아낸 뒤 화면을 내게 내밀었다. ‘이틀 전부터 고열과 기침이 심해졌습니다. 엑스레이를 찍어봐야 할까요?’ 번역기가 돌려준 문장이었다. 나는

“3층에서 엑스레이 찍고 오세요.”라고 영어로 천천히 말했다.

한 달 전쯤, 서울 학회에서 만났던 선배 의사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강 선생, 챗GPT 써봤어? 이거 써보니, 통역 직원 재계약 안 해도 되겠던데.”

그는 자신의 핸드폰에서 챗GPT 앱을 열어, 외국인 환자와 소통하는 법을 시연해 주었다. 그때는 그저 신기하게만 보았는데, 막상 내가 그 상황에 부닥치니,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잠시 후, 엑스레이를 찍고 내려온 아이를 다시 의자에 앉혔다. 나는 선배에게서 본 기억을 더듬어, 챗GPT 앱을 열고 아이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챗GPT에 정중히 부탁했다. ‘나의 한국어는 러시아어로, 엄마의 러시아어는 한국어로 천천히 통역해 줘.’ 놀랍게도, AI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내 말을 유창한 러시아어로 전달했다. 나는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주며 아이의 상태를 설명하고, 심해지면 입원이 필요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 별다른 시간 낭비 없이 전달할 수 있었다. 진료를 마친 러시아 소년 알렉스는, 내게 “안녀히 계세요”라는 서툰 한국말 인사를 남기고 돌아갔다.

아이가 나간 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통역에 짧은 공백이 있으나 얼마 가지 않아 AI의 머뭇거림도 아주 짧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선배의 말처럼, 단순 통역은 머지않아 AI가 완벽하게 대체할 것이다. 그다음은 무엇일까. 거대한 4차 산업혁명의 물결 앞에서, 의사라는 직업은 과연 안전할까.

이런 고민을 하던 중, 2023년에 발표된 한 기사가 떠올랐다. 하버드 연구진의 발표에 따르면, 챗GPT가 이미 미국 의사면허 시험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물론 시험 통과가 당장 책임 있는 의료 행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와 처음 마주하는 의사가 내 얼굴이 아닌 차가운 AI 모니터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AI가 의사를 대체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첫째, 의료 기록 작성 같은 단순 업무를 처리하는 언어 모델을 갖춰야 하고, 둘째, 축적된 임상 데이터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환자 개개인의 데이터에서 의미 있는 정보를 추출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종합해 의사의 개입 없이 스스로 진단과 처방까지 내리는 완전한 ‘AI 의사’가 되어야 한다. 신문 기사는 현재 기술 수준이 아직 의사를 대체할 단계는 아니지만, 결국에는 그 방향으로 갈 것으로 예측했다. 길지 않은 기사였지만, 앞으로 십수 년은 더 의사로 살아가야 할 내게는 가볍지 않은 이야기였다. 나는 과연 어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까.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얼마 전 읽었던 이승원 작가의 <사라진 직업의 역사>라는 책이 떠올랐다. 조선 또는 구한말부터 존재하던 직업인 전화교환수, 변사, 기생, 전기수, 유모, 인력거꾼, 여차장, 물장수, 약장수, 시대의 변화와 함께 사라져간 수많은 직업의 흥망성쇠를 다룬 책이었다. 작가는 말한다. ‘어떤 직업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직업에 대한 욕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라고. 욕망은 어떤 식으로든 모습을 바꾸어, 그 시대에 맞는 그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을 탄생시킨다.

2007년 1월 9일, 스티브 잡스가 선보인 아이폰은 인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단순한 전화기가 아니라 ‘내 손안의 또 다른 세상’이 된 아이폰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욕망을 낳고 또 실현시키며 세상을 이끌었다.

그리고 2022년 11월, 챗GPT가 등장했다. 2년이 채 되지 않은 지금, AI는 아이폰보다 더 빠른 속도로 우리가 살던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 거대한 변화 앞에서 나는 자문해 본다. AI가 가져올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어떤 모습의 의사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떤 새로운 욕망을 꿈꾸어야 할까. 오늘, 러시아에서 온 작은 소년 알렉스가 던져 놓고 간 화두 하나 챙겨놓고 다음 환자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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