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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니보이 Dec 23. 2021

엄마의 부적

지갑에 만져지는 작은 직사각형의 빨간 부적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 늘 내 몸 가까이 있었다. 


해가 바뀔 때면 전화가 온다. 

어머니가 다니는 절에서 건강이며 재운이며 또 말씀하지 않으신 

염원을 담아 만든 부적을 가져가라고 말이다. 

지갑에 있던 작년 것을 내어 드리고 얇은 지갑에 새 부적을 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뒷주머니를 두드려보면 그것만으로도 

일 년을 잘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왠지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물론 그 부적을 가지고 다니는 동안 교통사고도 두어 번 나고 

이천팔 년의 리먼 사태로 불어닥친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복판에도 섰었다. 

이사도 몇 번이나 하고 직장도 몇 번이나 바뀌고 하여튼 순탄하지만은 않은 날들이었다. 

교통사고도 났었지만 크게 다치지 않아 입원도 하지 않았었고 

직장을 옮기면서 연봉도 올라갔으니 문제없었다. 

이사는 하지 않았으면 부동산 광풍에 덕을 좀 보았을 텐데. 

하여튼 이리저리 헤아려 보니 내 짧은 요량으로는 부적이 뭔 효험이 있나 싶지만, 

어머니 편에서는 그렇지 않기에 아들이 뭐라 하든 개의치 않고 적은 돈이지만, 

돈 드는 일을 이십 년째 하고 계시니 이제는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 부적 덕분에 아범 삼재가 탈 없이 넘어갔으니 아무 말 말고 넣고 다녀라” 

말씀 이후로는 고분고분한 아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중학교 이학년 무렵 아버지 하시는 일이 잘되지 않아 어머니가 작은 식당을 하게 되었다. 

바닷가 근처이기도 하고 관공서도 멀지 않았기에 손님이 끊이지 않는 편이었다. 

식당을 그만두기 전까지 어머니는 아들에게 식당일로 잘 챙겨주지 못했음을 아쉬워하셨는데 

몇 년 뒤 그만두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서울로 대학을 가버린 아들에게 늘 마음이 쓰였던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가 끓여 주신 맑은 국물에 계란 풀어진 갈비탕이 맛있었다는 기억밖에 없는데. 

벌써 아이들 둘은 커서 그때의 나처럼 대학 진학으로 집을 떠나갔고 

하나 남은 아이는 일 년 뒤면 대학 입학시험을 볼 나이가 되었다. 

집을 떠나는 자식이 생기고 나서야 어머니의 그런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하는 건 나만 그런 것일까? 

지갑 한편의 부적을 볼 때마다 엄마에게 살며시 얘기해 본다. 

‘엄마는 최선을 다하셨어요’.

엄마의 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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