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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예 Oct 15. 2020

스타트업에서 일한다는 건

신발장 위에 놓인 면발 하나

신발장 위에 면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니, 이게 뭐지? 집에 가려고 사무실 문 앞 신발장에 갔는데 정말 면 한 줄이 딱! 저기 서있는 대표님을 보았다. 분명해, 범인이다. "아니 이게 뭐예요! 왜 면발이 있어요?" 혼냈다. 그가 라면을 먹겠다고 나간 걸 알았기 때문에, 너무나 웃기고 안쓰럽고 황당해서 물었다. 그랬더니 너무 바빠서 먹으면서 걸어갔다고 한다. '하... 눈물이...' 4걸음에 끝났다고 한다. 뭐 컵누들은 그럴 만도 하지!



나는 스타트업에 다닌다.


코로나 시국 속 여행 스타트업에 다닌다. 나는 바쁘다. 매일 바쁘다. 엄마는 말한다. "이 시국에 왜 여행사가 그렇게 바쁘냐?" 그러게 말이다. "엄마, 나도 모르겠어. 일이 자꾸 생겨... 우리는 계속 바빠"


우리는 늘 프로젝트 속에 산다. 무언가를 끝내면 끝내기도 전에 다음 아이디어가 나타나서 끝과 함께 시작을 준비한다. 주말에 몇 시간 정도 일한 지는 오래됐다. 졸린 건 아닌데 눈이 너무 피곤해서 자꾸 잠긴다. 어떤 분은 뒷골이 당겨 병원에 갔고 의자 위에 놓는 허리 보호 도구를 단체 구매했다. 이렇게 쓰니 일을 정말 많이 하는 거 같군!


맞다. 일을 많이 한다. "그래도, 나 일이 너무 즐거워!"는 절대 NO. 하지만, 이상적으로 내가 바랐던 스타트업의 모습으로 일한다. 바쁘게 일하는 모두들, 열심히 자신의 의견을 내는 팀원들, 대표부터 인턴까지 누구나 평등한 모습들. 일이 많아도 그 일은 함께 약속해서 만들어낸 것이고 더 잘하고 싶어서 하는 일들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1월 2일 부로 입사해 이제 10개월 정도 됐다. 사실 난 많이 말하고 주장하면 낙오시키던 회사에 다녔어서 입이 매우 무거웠다. 대표님이 말하시면 따라야 하는 거지. 경력이 많은 사람이 말하면 들어야지. 도전적이고 적극적이던 나는 사라졌고 수동적이고 소심해진 나만 남았었다. 이 무거워진 입을 열게 하는데도 오래 걸렸다.


서로 신뢰하고 충돌하면서 헌신한다.


신충헌. 마치 위인 이름 같은 이것이 회사의 모토다. 한 기업에서 가져왔다던 이 자세를 처음 들은 날. '나는 흠, 신뢰? 사람 잘 안 믿는데. 충돌? 나 충돌 정말 싫어하는데. 헌신? 나는 회사에 헌신할 마음이 없는데.' 혼자서 되새기다 이게 언젠가 가능할까? 이런 의문으로만 남겨뒀다. 아직 헌신의 정도는 조그맣지만 이젠 동료들을 믿는다. 회의에서의 의견 충돌도 겁내지 않는다. 존중 받으니까. 결국 존중 받는다는 걸 몸소 느끼니까 이렇게 되어갔다.


회사 자랑하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맞다. 근데 나도 들어줬으면 하는 게 있다. 정말 힘들었다. 폭풍 같은 시간들을 보내고 이제야 다닐만한 회사가 있다고 말하는 거다.



스타트업에 왜 갔냐면


보수적인 회사에 다녔다. 일은 좋았다. 내가 원하던 일을 했으니까. 대학교 내내 꿈꾸던 일과 거의 비슷한 일을 했다. 꿈을 이룬 거나 마찬가지였다. 근데 정말 아팠다. 성희롱, 성추행, 부조리. 이 사회의 악이란 악은 다 지켜보고 겪으면서 나는 문드러졌다. 심장은 꺼내기도 힘든 단단하고 무거운 돌이 생겨서 숨 쉬기 힘든 적도 있었다. 언제는 대화하는 한 사람의 얼굴만 빙글빙글 보이고 주변이 뿌옇게 변하는 기이한 경험도 했다.


탈출했다. 잘한 일이다. 명예, 미래는 잠시 묻어두고 나 자신을 위해 택했다.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소속 없는 생활은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고민했다. 콘텐츠 만드는 것도 좋아하고 마케팅에도 늘 관심이 있었다. 돈은 못 벌어도 괜찮다. 제발, 사람만 괜찮아라. 도대체 어디를 가야 할까. 생각하다 보수적인 회사, 큰 회사는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변화를 무서워하고 정치질 좋아하는 공간에서는 더 이상 하루도 못 버틸 거 같았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게 스타트업이었다.


젊고 열정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내게는 스타트업이 그런 곳이었다.



과연 그럴까?


세상은 늘 기대에 어긋났다.


IT 교육 스타트업이었다. 내 입을 무거워지게 한 바로 그곳! 4차 산업이 중요해지는 이 시대에 내가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게 있지 않을까?라는 헛된 기대를 가지고 들어갔다. 역시나, 세상은 달랐다. 계약서를 쓰자고 했다고 말 그대로 찍혔다. 동료와 그들에게 맞서다 동지애가 생겼다. 입사하면 계약서를 쓰는, 아주 당연한 것들이 안 지켜졌다. 특히나 작은 회사여서 겪는 문제들을 경험했다. 매일 투자받느라 밖으로만 도는 대표님은 소통이 하나도 안돼서 모든 팀들의 일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또한 스타트업의 패기로 3달 안에 직원들을 10명 가까이 뽑고 스타트업이라 받는 투자금으로 마케팅 비용을 마구 썼다.


그러다 월급 주기도 힘든 위기가 찾아와 직원들을 한 두 명씩 정리했고 나도 그중 하나가 되었고 결국 같이 일했던 직원들 모두 떠났다. 이때, 스타트업의 취약점을 알았다. 보수적이고 큰 회사는 절대 망하지 않을 거 같은 안정감이 있는데 스타트업은 하루 아침에 망할 수도 있구나! 이 작은 규모의 회사는 인사 시스템이 전혀 안 되어 있어서 엉뚱한 걸로 직원들을 힘들게 하는구나!



그래도, 스타트업?


그래도, 스타트업일까? 다시 취준의 시기가 찾아왔다. 그래. 그래도 스타트업이다. 대기업은 준비할 게 너무 많아서 이미 가지도 못해. 애매하게 큰 기업은 보수적일 거야. 나는 보수적인 게 더 힘들어. 마케터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할 수 있는 곳도 스타트업이다. 그래! 보수적인 것보다 망하는 게 더 나아! 스타트업으로 다시 가자!


스타트업 채용 사이트에서 내 갈 길을 찾고 있었다. 인상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가 화들짝 놀랄 만큼 싸한 기운을 품어내던 회사에 잠깐 들어갔다가 빠르게 나왔다. 그때 연락이 왔다. 마케터를 찾고 있다고. 그래 이런 시기에 나한테 연락이 왔으니 한번 만나보자. 나름 회사에 대해 조사는 했지만 역시나 시작하는 스타트업은 정보가 크지 않기에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면접을 봤다.


"어디서 뵌 거 같아요." 같은 학교라니까 학교에서 봤나 보다. 그랬는데! 입사 후에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매일 가던 동네 카페가 있었다. 취준의 시기에 책도 읽고 글도 쓰고 포트폴리오도 만들러 가던 곳이다. 그곳엔 나처럼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도 각자 바쁘게 무언가를 하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나처럼 뭘 열심히 읽는 사람, 전화로 열심히 떠들던 사람. 혼자서 많이 가는 조용한 카페여서 통화를 계속하는 사람들이 달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난 정말 이 험한 세상, 짜증 나고 화나도 무서워서 누굴 막 쳐다보지 않는다.


그런데 소름 돋게도 달갑지 않던 그 통화를 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우리 대표님이었다. 대표님 말로는 본인이 통화를 오래 해서 내가 째려봤다고 한다... 민망하게도 그때 그 통화하던 상대방은 다른 대표님이고 그때의 대화는 지금의 회사를 만들기 위해 한 회의들이었던 것이다.


정말 연이라는 건 있는 거 같다. 두 분 다 놀랍게도 인연이 있었다. 카페에서 본 대표님도 있고 학교 동아리 선배였던 대표님도 있고. 졸업 후 몇 년이 지나서 이렇게 만난 게 너무나 신기하다.



조금은 자랑할래요...


나 뭐 돈도 막 많이 못 벌고 일도 더럽게 많이 하지만 조금은 자랑하련다... 입사 첫날 계약서를 썼다. 이게 무슨 자랑이냐고? 당연한 거 아니냐고?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딨어! 이 말은 앞서 말한 신충헌 같은 내 모토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그래서 감동받았다. 과거는 미래에 영향을 미치니까 이래서 중요한가 보다.


아무도 담배를 안 피운다. 처음 입사 때는 나, 개발자님 그리고 대표님 2분이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 남자분들이었는데 모두가 비흡연자다. 이건 개인적으로 큰 복지였다. 이전 회사들에선 같은 팀 사람이 항상 담배 한 대를 피고 모닝 커피를 듬뿍 마시고 회의에 참가하거나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힘들었다.


1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화나 짜증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이건 세분의 훌륭한 인성 덕분이다. 나는 짜증을 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안하다 :) 그래서 배운다... 이렇게 써보니 놀랍다. 이런 적도 있다. 인턴 분들이 들어왔고 가끔 '하 이게 아닌데. 왜 실수할까.' 이런 마음으로 살짝 욱하려고 하면... 대표님이 떠오른다. '나한테도 안 그러는데 내가 그러면 안되지.' 이런 마음으로 차분해진다.


그리고 1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이상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예전 회사에서는 매일 들었다. 말실수라 쓰고 망언이라 읽는 그런 차별적이고 나쁜 말들을 거의 매일 들었다. 그런데 2020년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이전에 내가 들은 망언 리스트를 쓰면 특집으로 써야 할 것이다.


물론 중간중간 안 맞아서 힘들고 스트레스 받은 적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건 서로의 방식이 달랐을 뿐이지 인간적인 면에서 나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전혀 없다.


또한 일을 정말 열심히 한다. 잘한다. 내가 말한 이상적인 스타트업의 일을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지만 그 안에서 로직은 분명히 가지고. '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내가 본 옛 상사들은 다들 놀기 좋아했다. 정말 노는 것 말이다. 일은 안 하고 일은 후배에게 넘기고. 또는 동료들을 무시하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이렇게 일터에서 일보다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다 이 사람들을 봤다. 일이 너무 재밌다는 대표님... (아직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개발자님은 개발이 게임이라고 했다. 내가 주말에 일하지 말라고 했는데 본인은 그게 재밌어서 놀이라 생각해서 하는 거라고 했다. 물론 내게 마케팅은 일이다 :)


지금 가장 좋은 건, 내게 기대해준다. 역할을 준다. 의사결정권을 준다. 무거운 입이 가벼워지게, 말을 못 하던 때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기다려줬다. 말하고 나면 잘 말했다고 칭찬해준다... 기회를 주고 잘하기를 기대한다. 요즘엔 약간 기대기까지 하는 느낌마저 든다 :) 조금은 부담스럽지만... 모두에게 정이 생긴 거 같다. 귀엽게 느껴질 때도 있다. 내가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질 때 가장 먼저 생기는 감정이 귀여움인데... 아까 그 면발은 너무 웃기고 귀여워서 안쓰러웠다.



첫 회사를 그만두려고 할 때 나보다 먼저 직장 생활을 한 지인들이 말했다. 일, 사람, 돈 중에 선택하라고. 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이냐고. 그땐 셋 중에 한 가지를 딱 고를 수 없었다. 그저 사람 때문에 힘들었으니 가장 힘든 건 사람인 거 같다면서 그만뒀다.


일, 사람, 돈.


지금은 말할 수 있다. 답에 가까운 가치를 찾았다.

사람이다. 사람이 먼저다 :)


나는 스타트업에 다닌다.

나는 좋은 사람들이 있는 스타트업에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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