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타민)를 ㅏㅅ 주세요.
어둠을 닮고 있어 이건, 우주를 포함시켜.
영화는 샐러드(\=비타민)를 ㅏㅅ 주세요.
모든 게 막힐 때는 초능력을 쓰면 된다.그렇다면 초능력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마음에 있다. 발명의 씨앗은 초능력으로부터 시작된다. 시작된다고 믿으면 된다. 믿음의 씨앗은 종교로부터 있는가? 아니다. 마음이 먼저다. 마음이 먼저 나타나, 태어나, 우리가 살아있어 믿음이 종교가 되었다. 나는 종교를 초능력의 모태라고 본다. 그러면 직업이 되고 돈이 나타난다. 돈은 어디에 있는가? 식사에 있다. 식사를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음식을 섭취하는 냐에 따라 어떤 능력을 발휘할 것인가에 다다른다. 식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앞에 수저가 놓여있다. 이를테면 즐거운 노래를 부르는 아이를 보는가? 그 아이에게 언제나 돈을 주고 싶은가? 어디에 능력이 있는가? 능력이 있으니 항상 돈을 주고 싶은 것이다. 그 능력이 돈을 주지 않고 모이다 보면 그 아이를 위한 나의 미래와 연결된 화합을 위한 초능력이 생긴다. 나는 그 아이를 위한 시계를 선물해 줄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것이 앞으로의 삶에 어떤 능력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피앙새를 찾는 순간에도 그 아이를 보살피는 마음이 있다. 나는 그 아이의 엄마도, 앞으로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는 미혼이며 미혼의 팔자로 즐거운 인생을 계획하기에 그 아이의 시계가 충분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내가 조카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시계는 아마존에서 2.99달러에 단순하게 판매하지 않았다. 아이를 위한 시계는 카메라가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구매한 5.99 달러 이상의 중국 시계에선 카메라 모양만 있고선 기대되로 어떤 기능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나는 내 돈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신뢰하는 고객으로서 아이에게 가격의 평등성을 알려주었다. 아이의 미소는 생각보다 지쳐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2가지 이상의 학원에 다니고 있던 나의 조카는 어느새 멋진 수료증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미소는 쉼을 뜻했고, 시간적으로 여유있던 나보다 쉼을 더욱 확실히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나에게 용돈을 주고 있었다. 3000원이면 3시간 무료로 지나간다. 나는 무료를 얻을 수 있었던 사람이다. 조카는 나에게 아이가 되어주었다.
10년도 지낸 잠재의식의 힘이라는 책이 있다. 그것은 의사가 썼는가? 의사는 그것으로 쓰고 있는가. 청전기. 내 이름은 정다은이다. 이 책으로 나를 홍보하고 나를 위한 책을 쓰고 싶다. 돈이 벌어지는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머리를 떠나질 않는다. 화를 내는 나의 자화상이 계속해서 머리를 어지럽힌다. 더 큰 사랑을 인식하고 쓰고 싶어한다. 의사는 나에게 청전기를 보여주었다. 거기선 돈을 낸다는 개념이 사라진다. 나의 아픔의 과정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긴장되는 순간은 잠시다. 아픈 것은 꽤나 나의 습관이었다. 아프지 않았던 것도 꽤나 그 습관이 사라질 수 있다는 증거였다. 많은 것을 체득했겠지만 어린시절의 기억은 잠시 스쳐지나고 만다. 마치 TV에 수없이 똑같은 창면의 청전기와 인터뷰가 보인다. 나의 어린시절이 없더라도 추억을 덧입힐 수 있다면?
모든 게 술술 풀린다는 책이 많다. 식사가 중요한데 말이다. 나는 이제부터 식사를 위한 책을 쓸 것이다. 다이어트를 위한 생활에서 식사를 위한 생활로 바꾸었다는 책은 이전에도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이다. 이 책으로 많은 것을 얻겠지만 삶의 방향에서 아플 수도 있다는 확실한 사실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랑과, 섹스와, 연애 등을 하고 싶지 않은가? 그들을 위한 계획적인 책이다. 그렇다고 스님이나 목사가 되고자 하는 자들을 막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도 연애는 1번 이상 겪어보고 ‘우리의 경험과는 필시 다를 것이다.’
모멸감을 얻을 때.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주위 간섭에 의해 모멸감을 얻는 것 또한 그냥 아픔이다. 이별 한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내가 거절 받았거나, 내가 이 작품을 위해 거절된 상태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니 나는 조카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 지난 시간들 보다 껄끄러웠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나의 여유가 글로 인해 사라진다면 모멸감을 준 상대는 건강을 챙기지 않았던 나에게 실망하고 만 것이다. 나는 어떤 것이 막히었다 생각하는 것을 이제 멈춘다. 초능력은 1장의 채움에서 발휘 되었다. 시시하다. 슬픔이 찾아온다. 나름대로 아이와 나의 관계성에 순수함과 함께 했다 하더라도 내 유년기의 우정보다 깊겠는가? 순수에서 우정으로 시작된다면 나는 또 할 말을 잃는다. 분명 꿈속의 나는 아주 어리더라도 어른들이 말하는 관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것을 말해보기도 했다. 교육아래 있는 부산의 생활에서 불편함 없이 아버지,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꿈의 이야기를 적당히 흘러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려놓음이란 무엇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도 오지 않는다면 참 좋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있어보는 것이다. 쉽지만 백수라는 생각은 특히나 하지 않고, 돈이 없거나 현실의 직면에 다다르더라도 그냥 원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니 그렇게 쭉 더 있어본다. 달라진 것이 없는 나의 세상이 무척 감사한 적도 많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도 덜 하고 그저 가만히 있어본다. 1시간이 지났는가? 시계도 보지 않는다. 시간의 여유나, 내가 다시 챙기지 못했던 것들을 뒤돌아 보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 인맥으로 변한 시간이다. 나의 주변 사람들이 인물이 되어 나타나기 전에 그들도 나를 보지 않을것인가? 내가 인물이 되어 나타날 때 그들은 날 볼 자신이 있는가? 주변에 꽤나 화가 나 있는 나는 내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내어맡김은 무엇인가. 철학에 관한 이야기다. 연라처를 둘러다 본다.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을텐가? 내가 꽤나 적극적으로 실천해보았는데, 중국의 언어로 교수의 자리를 방해하는 사람도 있다. 아이의 울음소리로 지지의 느낌을 준 사람도 있다. 증거의 모순으로 알뜰 요금제로 3사 통합의 시즌을 계획한 사람도 있다. 멋지다. 세상에 감사가 길지 못한 이유다. 여자의 대표가 된 것이면 되지 않는가? 그럼으로서 이 말투와 습관이 그들처럼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세상의 논문만 태어난다. 나니깐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왜 성공이 어떤 것으로부터 바라지 않으면서 시작되는지 알게되는 순간이다. 나는 오늘에서야 내 성공에 자신이 있어진다. 부모로 부터도 멀어져야 하나요? 비듬이 든 손톱에 대답을 대신합니다. 이렇게나 싸가지 없는 대답으로 인맥을 두지 않을 수 있는 나의 상황을 잠시나마 느끼게 한다. 그들은 혼자 조용히 공부하더니? 그렇지 않다. 대대적으로 알리면서 공부한 그들은 어디든 유명한 곳에 진출한다. 얼굴색이 그늘지고, 언제나 아픈 소리를 할 것 같지만 어른이라면 그렇지 않다. 정치와 사회분야에 언제나 해박한 그들은 가족과 함께하는 사랑으로 꿈과 희망 또는 가장 잘해온 사랑을 전달하고 있다. 인맥이 없더라도, 있더라도, 사랑은 싸가지 않에서도 계속 된다.
각자 가정의 사생활에 보아, 저 친구는 가족은 사랑으로부터 있었던 것이지 실망과 회한으로부터 나온 질문은 아니다. 나는 혜민도 법정도 아닌 스님의 생활을 그들보다 다른 장소에서 같은 책을 보고 3시간은 체감했다. 이것은 글이고 경험으로 진행되는 것이지 불교대학이 없는 한 나는 그냥 여기서 글을 읽고 있는 문학에 가까운 수능으로 결혼도 진행하고 싶은 여성이다. 그들은 나의 미래를 지지해줬고 나는 언제나 종교의 힘을 빌러 이 자리에 왔다. 지금은 2000명의 여성에게 사랑을 얻고 있다. ‘baby, 오늘은 뭐해?’ 이런 소리를 매일 듣는다면 어떨까? 정신병에 걸리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달이상 감내하며 그들의 사랑을 독차지 한 적이 있는데,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나의 자의로 인한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암시하는 어두운 그림자도 드문드문 찾아온다. ‘My baby...!’ 실제로 아기도 있는 여성의 속삭임은 남편을 위한 울림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베이비시스터 이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준 음성은, 미래에 우리 아이에게 읽어줄 책들과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잘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해본 이야기는 아니다. 나의 경험이 그들과 다르다. 가정환경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한다. 말을 그냥 하기도 한다.
철학의 끝에 우리는 왜 죽는 것을 희망하는가. 소크라테스가 죽은 것은 죽을 때 어떻게 죽는 가를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서라는 형식의 편지를 생각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편지에는 다양한... 그냥 소크라테스가 가장 유명한 사람이면서 우리나라에 잘 없는 이름이며 성씨가 어디에 존재하는가? 희망하다 다시 야한 것이나 찾아보자! 이런 결론에 다다른다. 서울에나 가보자! 그럼 나는 아주 작은 사람이 되어 섹시하기도할 테니까 얼른 결혼이란 것을 잘 해결해볼지도 몰라.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정상 여자잖아? 철학의 끝에 희망이 있는 것이지 삶의 끝까지 파고들어 보고 싶었던 나는 스님의 역할보다 철학자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아무도 그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의사의 책상 뒤편에 자크라끄 깽 언어가 있었다. 결국 나는 정신질환의 약을 먹으며 2년을 시달렸다. 보통 성공직전의 나폴레온 힐만 그렇다던데. 자기계발에 희망을 건 내가 죽음과 친해진 것인지 가장 많은 주민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대학병원에 도달했다. 어딘가 아픈가? ‘아프지. 이상한 음성이 들린다.’며 ‘들린다.’ 무서운 이야기다. 나는 열반에 드는 지 같은 생각도 했다. 이건 명상 책에서 가끔 나오는 얘기같다. 물론 지금 나 까먹은 책 제목들. 나는 그래 그게 아쉬웠다. 수억권의 책을 읽었다. 글을 보았다. 자랑을 하고 싶었다. 성공에 앞서 자랑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본인 자본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았다. 드러냈어도 내가 보지 못할 만큼 시커멓게 숫자로 가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벌 수 있는 돈은 결혼자금으로 머물게 했다. 우리나라에선 가장 중요한 이야기다. 나는 결혼, 여성, 미혼을 얘기하고자 한다.
아직도 조금 아픈 사람이다. 나는 조금 아픈 것인지 누군가 나를 맹렬하게 추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어쩌면 전 세계에서 내가 가장 많은 컨텐츠를 집중하고 몰입해서 소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쓰고 있는데 읽고 있으며 듣고 있는데 들리고 있다. 의사는 나를 봐야한다. 대한민국 의사는 전부 나를 알아야 한다. 거만과 허세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면 남자랑 결혼해도 참 괜찮을 텐데. 소크라테스는 성별을 말하지 않았다. 유럽은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 미국도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 완전히 다른 것에 나는 몰입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몰입이 결국 책으로 나왔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과정에 가까운 것들이 책으로, 노래로, 드라마로. 질투가 날 정도다. 한 발짝 먼저 나왔다는 것을 알리는 주파수도 있었다. 목소리도 있었다. 외모는 이제 많이 보인다. 숨소리도 느껴진다.
소크라테스는 죽었는가? 이야기 중에 반문을 확실히 제기하는 책. 나는 모든 유럽인의 유명인이며, 나는 모든 연예인의 말도 못할 이상형이 되었으며, 나는 모든 나로부터도 사랑받고 있다. 가족의 무한한 지지는 늘 여전함을 보여주는 연기로서도 느껴지지 않을 정인가. 가족의 이야기는 말하는 것이 불편하다. 내가 아끼는 사람은 성정체성이 귀하다. 나는 그들로부터 태어났다. 아빠가 엄마보다 고우며 언니는 나보다 일을 잘한다. 엄마는 주부지만 주부로 태어난 것이 아님을 늘 알리고 계신다. 나만그런가? 내가 살펴보니 많은 가정들이 그런 것 같다. 이런 게 꼭 대한민국 스러운 게 아닌가? 우리는 애초에 철학의 요소와 함께 컸는데, 만약에 이런 것들을 빨리 소화하지 못하면 예민해지는 병에 걸리고 말텐가? 정신질환에 속하고 말것인가? 그렇지만 나는 지금 철학과 정신을 비슷하게 묶어놓았다. 유명한 철학자가 수업에 있다. 철학자가 되었거나 유명해졌거나. 내가 말이다. 어떤 것도 남에게 주고 싶지 않아졌다. 모든 이야기를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끝내야만 성에 차다. 이럴 때 큰 돈이 들어오는가? 큰 돈에 대한 그림자를 잊을 만큼인가? 그림자는 유명성으로부터 지워질 텐가? 철학의 사유로 묻힐텐가? 교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들리는 말투가 점잖아 졌다. 또래와만 이야기하고 싶다. 눈을 마주쳐야 나도 사람이다. 인맥을 쌓은 적이 없다. 대화도 대사도 모든 것이 나에게 읽히는 중이다. 통찰력과 이해력이 난무하면서 자아에 고통이 찾아왔다. 그냥 뇌가 아픈 것이 아닌가? 생각이 힘든 것이 과도하면 자아가 힘든 것인가? 자아는 어디에 있는 아픈 구석인가? 대답을 할 틈을 주지 않고 나는 듣기만 하면서 약을 처방받았다. 남성. 내가 나에게 내린 결론은 학원가에서 해보지 못한 남성이다. 또래 남자들만큼 목소리도 달라졌는데, 아쉽게도 성정체성도 알려졌는데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로서 강인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나는 그냥 그렇게 남성을 겪어냈다고 보고싶다. 그러다가 치매는 매칭의 문제라고 까지 여겨졌다. 젊은 치매를 눈뜨고 볼 수 없어서다. 젊다는 것은 젊다는 것이다. 치매는 그냥. 젊음에 아픔을 과도하고 넘기고 있다. 늙어서 더 아프면 젊어서 아픈 것이 성숙의 정말 과정이겠지? 이런 긍정도 이제는 지겨움이 되었다. 시시하다면 문장이 새로워지면 된다. 그건 매칭이 필요한 순간이다.
면접장소다. 수첩이 사라졌다. 메모장이 사라졌다. 용량이 다 찬 메모장에 나는 더 이상 지난 시즌의 폰을 보고 싶지 않았다. 왜? 메모가 필요한 순간에 메모를 보면 나는 젊은 증후군 모두에 속할 것이다. 미래예견으로 말하면 언제나 불안증상에 시달리고 말 것이다. 그런 병을 2~3년간 앓고 있었다. 병이라고 말씀하신 분은 아무도 없었다고 믿고 있는 병까지 생겼다. 병에 병이 있다면 어떻게 넣었을까? 게이를 말하는 것인가? 나는 다시 철학과 성정체성을, 유명성을 이어붙이려한다. 사람은 만들어졌는가?
예의가 없는 사람은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5년간 어디로부터 삐져있었는가? 아시아의 키는 삐져있는 키 아닌가? 왜이렇게 많이 크질 않는가? 술 한잔 먹고 잊어버릴 수도 있는데 19세 미만은 그러지도 못한다. 친구의 어깨에 기대에 잠시 쉬어갈 수도 있는데 뒷자리의 수군거림에 그럴 수도 없었단다. 이런 관심이 나에게 무관심이 필요하다는 삐침의 현상이 모발에서 나타났다. 모발을 신경쓰는 수많은 아저씨들이 나에게도 스트레스를 알렸는가? 나는 그럴까봐 볼륨매직을 하는 소녀가 되었다. 나의 정체성은 언제나 여성이며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여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성교육이 특별나게 일어나지 않았다. 반대로 나의 성별은 학교의 성교육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내 몸의 색은 한결같지는 않다. 구릿빛으로 표현하면 너무 짙고 살색이라고 정확하게 말하는 거이 어쩌면 가장 옳은 표현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결국 창의력을 포기하고 잠시나마 이름짓기의 이름을 이름이라고 말하는 실수를 범했는데, 모든 학우들과 선생님은 거기서 빵하고 웃으셨다. 빵의 읾을 빵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당혹한 발언을 할지라도 ‘남성 같은’ 나는 여성이며 언제나 여성을 사랑하며 살 것이다. 이것이 어떤 정체성보다 중요한 문장이다. 나같으면 페이지 하나는 찢기 위해 이 책을 한 권더 살 것이다. 한 권더 살 것이다. 한 권에 한 권 더 쯤 산다면 이제야 나도 이 친구와 함께 했던 철학자며 인플루언서다. 영향력있는 여성이다. 이런 나는 아이를 얻거나 낳을 자격이 있으며, 내 친구도 그러면 좋을 텐데. 나는 만 35세에 나의 아이를 생각한다. 여성과 여성이 함께 하며 얻는 아이를 생각한다. 그런데 무언가 부족하다. 한결같이 일을하며 조금은 거친 피부가 된 남성의 면모를 놓칠 수가 없을까? 그럴까봐 나는 또 남자의 고운 피부를 한결같이 칭찬한다. 약간은 거친 모공은 내가 가졌다. 나는 언제나 내 피부를 사랑스럽게 보지 않는다. 상대의 칭찬이 논리적으로 합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입사지원서는 연기학과가 있는 곳에, 4년제는 약간 중국인 스러우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2년제 호텔리어에 주눅들지 말라고 벌써부터 위로했던 여자 교수님은 나에게 전화한통으로 모든 것을 안아주셨다. 나는 튀지 않는 사람이다. 더 이상 튀지 않는 것이 또 나는 아니다. 내 동기는 사라질지 모르지만, 나의 정체성이 발표된다면 또 다른 내 동기가 질투할까봐. 여자의 마음을 여자가 안아줘야 한다면, 여자 교수님은 그날 그초에만 여자셨던 덕분에 그냥 교수님 이셨고 나는 고등학생처럼 장학금을 받지 못할까봐 또 근로장학생이 되어야만 했다. 우리나라에 피해자가 있는가? 소문이 빠르고 무성한 우리나라에 피해자가 있는가? 철학과 유명함과 정체성, 피해자, 우리나라 전부 여성이다.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있다. 한 나라가 여성일 때 콘텐츠에 힘이 나는 것은 실제로 남성도 많기 때문입니다. 50%의 가정에서 55%이상의 환경에서 남녀가 조화롭게 있는 우리나라에서 죵교의 뿌리가 잘 자라나고 철학이 특별히 깃들지 않으면서 ‘나’의 특별함이 오늘 세상에 알려진다. 어떻게? 많은 셀프 사진을 고전적으로 보여줬다.
중국인. 턱이 심각한 사람을 눈. 나는 보상을 다 얻었는가? 내 기억이 사실인가 싶은 정도면 중국인의 행동역학이 한국여성에게 일본인 만큼이나 별로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이튼 나는 그것으로부터 다시 여성임을 알게 되었고 남자친구가 많이 생겼다. 나의 내면 약속은 진행되지 않은 채 고등학교 생활을 마무리 한 것은 중국인은 계획하는 습성이 있고, 일본인은 치밀해보이지만 주먹밥 큰 것을 얻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한국인은 어떻게든 먹고 살면 되는 거지속성이란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시아인을 비하하는 서양인이 또다시 있다. 축구인은 유럽인 스럽다. 사랑스러운 것으로는 아프리카사람을 포함안할 수 없게 되었다. 똑똑한 것은 동남아가 가져가려니? 우리는 정체성을 나라로 바꾼다. 그러면 유학의 개념이 나타날까? 초능력이다. 비하의 초능력이다. 비하의 한 문단에 쫄지말자. 나는 조덕규의 자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