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학교 가는 길에 [정 피아노] 간판을 보는 게 나의 습관이었다. ‘잘 있나?’ 교습소 내부가 보이지는 않아도. 간판을 보며 왜인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정 피아노’의 건너편에는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나는 그 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바로 피아노교습소에 갔다. 그곳에 가면 엄마가 있었다. 때로는 내가 대신 교습소 문을 열기도 했다. 그곳에 아무도 없으면 홀로 밥을 먹기도 하고 혼자 피아노 연습을 하기도 했다.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피아노 방이 세 칸 남짓 정도로 있고 이론 공부를 하는 조그만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엄마는 나를 뱃속에 품었을 때 피아노를 배우며 태교했다고 한다. 배 안에서부터 클래식 음악만 듣고 자랐지만, 뛰어난 음악가는 되지 못했다. 태교, 이거 잘 된 건가? 누군가에게 엄마가 피아노를 치며 태교했다고 하면 아주 대단히 교양 있는 집 안에서 교육받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피아노를 배우러 멀리 유학을 가거나 전공을 하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라디오로 클래식 채널을 즐겨듣고 매년 오케스트라 연말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하였다. 엄마의 욕심이었을까. 피아노뿐만 아니라 플루트도 배웠고, 동생은 바이올린을 배웠다. 가지고 싶은 예쁜 필통이나 장난감은 사주지 않았지만 배움에 있어서는 아낌없이 투자하는 엄마였다.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어느 어린이의 크리스마스.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 같은 말에 겁을 먹지도 않았지만, 하여튼 선물을 받는 건 당연한 거고 나는 어떤 선물을 받을까 기대하는 중이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평소 가지고 싶어 했던 장난감 세트를 받아 갔다. 산타할아버지는 먼 나라에서도 아이들이 가지고 싶은 걸 어찌나 섬세하게 잘 알았는지,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지금도 생각난다. 그런데 나의 산타할아버지는 왜 이리 내 마음을 모를까? 나에겐 한 손으로도 들 수 있는 작은 선물이 쥐어졌다. 아주 네모나게 각이 진, 포장지를 뜯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이 선물. 책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별무늬가 가득한 포장지를 재빨리 뜯어 봤지만, 예상 대로였다. 하나 예상 못 한 점이 있다면, 책이 한 권이 아니라 두 권이었다는 점. 품 안 가득 커다란 장난감을 낑낑거리며 들고 가는 친구들을 보니 부러움이 몰려왔다. 그때 나는 산타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적어도 엄마가 산타에게 협박해서 자신의 입맛대로 선물을 바꾸었거나.
다시 피아노로 돌아와서, 뱃속에 나를 품고 피아노로 태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엄마에게 남은 건 집안일과 아기 키우는 법 그리고 피아노 이론뿐이었던 거다. 엄마는 피아노교습소를 운영하면서 돈을 계산할 때 손을 탁탁 튕기곤 했다. 그게 엄마의 버릇이었다. 주산을 배워 사무직으로 일하던 시간이 몸에 밴 거다. 시대가 너무 많이 변했고, 빨라졌다. 엄마의 주산 실력으로는 빠르게 변화하는 컴퓨터 세상을 따라갈 수 없었다. 1997년 엄마는 나를 임신하면서 IMF도 같이 맞이했다. 격변하는 시대에 가장 먼저 해고를 당한 건 아기를 품은 임산부였다. 그 길로 엄마는 회사를 나왔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기보다 주산 튕기는 손에 더 능숙했던 선생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피아노 학원을 문 닫게 된다.
피아노교습소 문은 닫았지만 나의 태교를 도왔던 피아노는 몇 번의 이사를 거치는 동안 계속 우리와 함께했다. 집이 아무리 좁아져도 피아노는 늘 거실에 있었고, 나는 그 피아노에 앉아서 뚜껑을 활짝 열고 온 동네가 떠나가라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
많은 시간이 흘러 내가 자라서 독립을 하고 좁은 원룸에서 투룸으로 이사도 갔다. 엄마는 피아노를 나더러 가져가라고 했다. 피아노로 무언갈 거창하게 이룬 집안도 아니지만 나와 동갑의 나이를 가진 피아노를 버리기가 아까워 품기로 했다. 어쩌면 엄마의 시간을 품은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