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지옥으로부터의 탈출

메뉴 고민을 멈추자 내 시간이 시작되었다

by 조이

나는 도피 중이다.

밥 지옥으로부터 탈출했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30년간을 식사 준비를 해왔는데 번아웃이라도 온 걸까.


30년이라니..

거대한 프로젝트를 쉼 없이 완수해 온 거 같다.


세 아이를 키우며 하루 세끼, 1년에 천 번 넘게 차려낸 밥상은

사랑이기도 했겠지만, 동시에 엄청난 노동이었다.


'오늘 뭐 먹지?'라는 메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 상태였다.


나이가 들수록 창의력이 고갈되어 갔다.




남편 직장 이전으로 지방 소도시의 작은 오피스텔로 왔다.

아들 둘을 본가에 놔두고 나온 거다.


30년이라는 장기근속 끝에 얻어낸 소중한 안식년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성인이 된 아들 둘을 본가에 두고 오니

마음 한구석이 조금은 신경이 쓰이기도 하지만...


사실 두 아들도 이제 스스로 생존법(라면을 끓이든, 배달을 시키든)을

익힐 때가 된 거다.

아들들이 스스로 챙겨 먹는 법을 배우는 건, 그들의 인생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과정이다.




소도시 오피스텔의 생활은 묘미가 있다.

오직 우리 부부 누울 공간이 있고, 소소하고 단출한 일상이다.

그냥 간단한 샐러드나 빵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워도 괜찮다.


낯선 곳에서의 해방감도 있다.

아는 사람 없는 소도시의 익명성은 생각보다 큰 자유를 준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온 해방감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


그 공기가 얼마나 상큼한지.

마치 낯선 여행지에 툭 떨어진 것 같은 설렘이다.




죄책감은 지우자.

본가의 아들들이나 집 생각은 잠시 접어두자.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때로는 가장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 작은 오피스텔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너무 황홀하다.

특히 밤에 보이는, 저 멀리 아파트 단지의 수많은 불빛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남편과 여기 동네에서 정착할지, 본가로 가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 불확실성이 오히려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강력한 증거처럼 느껴져서 참 다행이다.


무조건 돌아가야 한다는 의무가 아니라

어디서 살지 고민해 볼 수 있다는 자유가 생긴 거니까.


아들들에게도 엄마의 부재는 스스로 어른이 될 기회이다.

좌충우돌 형제가 부딪히며 우애도 돈독하게 만들고, 무엇보다 그들 만의

추억이 생기는 시간인 것이다.


난 본가로 돌아가서 다시 모든 수발을 드는 삶으로 회귀할지

아니면 소도시에 정착하며 자식들이 가끔 손님처럼 찾아오는 관계를 만들지

고민해 보려고 한다.


남편과 둘이서만 보내는 이 시간은 신혼때와는 또 다른 동지애와 여유를 준다.


남편과 조깅을 하고 간단한 샐러드로 아침식사를 한다.

우리는 더 가볍고 즐겁게 살고 있다.


우리 부부는 여행 중이며 새로운 길을 고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