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이 곡할 노릇이라 해야 할까, 뒤로 넘어져 코가 깨진 거라 해야 할까. 모처럼 가족들이 모였고, 저녁식사 후 나는 수박을 꺼내와 썰고 있었다. 그런데 네 번째 조각을 자르던 찰나, 손목 스냅에 말썽이 생긴 건지 나는 과일 대신 다른 걸 썰고 말았다. 내 손 힘보다 단단한 수박 껍질에 순간 칼날이 박히면서 손잡이를 놓쳤고, 칼은 180도 돌아 내 손등을 쳐버렸다.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나.
1초도 안 된 시간이었다. 나는 손을 움켜쥐었고 이내 빨간 액체가 움켜쥔 손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포만감은 일순간 하얗게 흩어졌다. 잘려나간 살점 자리로 손등 살의 두께가 드러났는데 우리 피부는 그저 얇디얇은 껍데기였다. 나는 해부학 교실의 비자발적 참가자처럼 어쩔 수 없이 그 인체 구조를 목도하고야 말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왜 이름밖에 남길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생생히 깨달아졌다.
밤 8시쯤 부모님과 함께 찾아간 시골병원 응급실에는 간호사 한 명, 원무과 직원 한 명, 의사 한 명이 있었다. 간호사는 내 상태를 확인한 다음 의사를 부르러 갔고, 의사는 5분 이상 지난 후에야 어기적대며 나왔다. 자다 나온 것 같지는 않은데 굉장히 짜증스러운 표정에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그는 나를 한 번 훑어보고는 왜 이런 거냐고 건성으로 물었다. 나는 아까 간호사에게 했던 설명을 그대로 반복해야 했고, 육중한 체구의 젊은 의사는 내 말을 들은 건지 만건지 간호사에게 핀셋을 달라더니 환부를 들었다 놨다 했다. 환자에 대한 예의는커녕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없었다. 아파서 '아'소리를 내니 근육이 다쳤는지도 모른다며 내일 정형외과 진료를 보란다. 벌어진 손등 이대로 그냥 가라는 거냐니까 자신을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내일 정형외과 가라고만 반복했다. 내가 본인의 자유시간을 침범하는 민폐객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왜 화를 내세요? 그렇게 일하기가 싫으세요?'하고 따지고 싶었지만 아예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간호사는 빨간약으로 소독을 한 다음 붕대를 칭칭 감아주었고 진통소염제 하루치를 건네주었다. 계산을 하고 있는데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운 할아버지가 응급실로 들어오셨다. 할머니는 아프다고 끙끙 앓으셨고 간호사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의사는 역시 짜증을 달고 느지막이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서 의사라고 하면 대접받는 직업인데, 인간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최소한의 직업윤리는 있어야 하지 않겠니?
다음날 아침, 나는 병원을 다시 찾았고 정형외과로 갔다. 간단한 봉합 케이스 같은데 의사 선생님은 힘줄이 찢어지지 않았는지 절개해서 확인을 먼저 해야 한다며 나를 수술실로 입성시켰다. 과잉진료 같았지만 시골이고 당장은 봉합은 해야 하기에 의사분의 의견에 따랐다. 몹시 떨었는데 수술실 스텝들과 집도의는 매우 친절했다. 수술이 끝나고 스텝들이 마무리를 할 때 나는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어제 응급실 의사 얘길 꺼냈다. 아무리 시골에 의사가 부족하다 해도 어차피 봉사도 아니고 직장 생활하는 건데 그렇게 환자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게 말이 되냐, 나는 어차피 한 번 오고 말 사람인데 여기 사시는 노인분들한테 그런 식으로 한다는 것에 충격받았다, 병원에 민원이라도 넣고 싶다, 그런데 수술실 분들은 완전히 다르셔서 놀라고 감동했다, 며 동네 아줌마처럼 재잘거렸다. 간호사분들은 응급실 직원들을 모른다고 했고 그런 일은 말이 안 된다며 본인들이 죄송하다고 했다. 그리고 시골이라고 의사가 부족하지 않으며 다들 좋으신 분들이라고 했다.
2주 후, 실을 뺐고 살은 덜 아물었고 위로 약간 솟아오른 꿰맨 자국이 완전히 가라앉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하단다. 위로를 찾자면, 삼십 년 넘게 방치되었던 내 우뇌가 이 기간만큼은 더 활발히 운동했을 거란 사실이다. 그동안 철저히 소외됐던 내 왼손이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왼손으로 세수를 하고, 왼손으로 물건을 들고, 왼손으로 글씨를 썼다. 뭐 재미난 일 없나, 했던 이번 여름은 전 지구적 감염병에서 안전히 피신하고자 집구석을 택했던 내게 별스런 추억을 선물했다. 더불어 내 직업의 도덕성에 대해서도 환기시켜주었다. 훌륭까진 못되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인간만은 되도록 하겠다. 이름값은 하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