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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에게

일본 - 나가사키(Nagasaki)

by 다온


저는 어딜 가나 사진을 많이 찍는데 음식 사진만은 찍지 않습니다.

예쁜 잔에 담긴 음료 외에 먹는 게 사진에 있으면 속이 불편해지는 것 같아서요.

맛집도 찾아다니지 않는데

일부러 찾아가 길게 줄 서서 비싼 돈 주고 먹어보면 이런 게 바로 광고효과구나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가사키는 제게 특별한 경험을 주었어요.

순전히 그 '나가사키 짬뽕'이라는 고유명사 때문에 직접 가보고 싶었거든요.

살다 보면, 없던 추억까지 상기시키는 노래를 만나기도 하죠.

나가사키도 그렇고 짬뽕도 그렇고 제겐 그 어감이 왠지 모를 향수를 피어나게 해요.

평소 그 맛을 자주 즐기지도 않고 그 두 단어는 저와 아무 연결고리도 없는데 말이죠.

혹, 아날로그를 동경하는 자의 취향이라 해도 될는지요.

삶의 질을 위해 감성소비도 주기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손쉬운 마케팅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어쩌겠어요, 큰 힘 안 들이는 선에서 잠시나마 행복하다는데. 나가사키에서 만 이틀을 보내는 동안 그 음식을 하루 한 번 이상 먹었는데

게스트하우스 아르바이트생에게 물었더니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그곳은 비싸다며 다른 곳을 알려줬어요.

가격은 절반에 맛도 좋았습니다.

이만한 퀄리티면 됐지 뭘 더 바라나요.

네, 관광객은 저뿐이고 다 현지인들이었어요.

참, 카스테라 얘기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16세기에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전해졌다는 이 진노랑의 밀도 있는 스폰지 케익이죠.

정말 맛있는 기억입니다.

나가사키는 맛과 장소와 문화에 개항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어요.

일본의 3대 다리이자 가장 오래된 아치형 돌다리라는 메가네 바시, 그리고 도로 위의 전차도 낭만적이에요.


그런데 돌아보니 막상 이 도시의 키워드로 남은 건 따로 있더라고요.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에는 팻 맨(Fat Man)이 떨어졌습니다.

사흘 전엔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Little Boy)가 떨어졌었죠.

세계사적 일이고 과거 우리나라의 운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평화공원, 폭심지 공원, 우라카미 성당으로 이어지는 도보코스를 지나기 전까진 실감을 못했습니다.


원폭이 떨어진 중심지에 기념비가 서있고 그 주위로 동심원이 물결치네요.

옛 우라카미 성당은 외벽 한 줄기만 남기고 다 사라졌고,

재건된 성당 옆에는 당시 날아간 종루가 처참히 고꾸라져있습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상은 애처로워요.

타는 목마름으로 검은 비라도 마시고자 했던 피폭자들의 한을 풀어주고자 분수가 있고요.

공원 외진 곳엔 한국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있어요.

생각해보니 제게 나가사키를 각인시킨 건 저의 식탐보다 군함도가 먼저였네요.

역사 덕후의 본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너무 어둡고 긴장될 게 뻔해 가볼 엄두는 못 냈습니다.


내 삶도 그리 가볍지 않은데 제 발로 무거운 심상을 찾아간다는 건 어석어 보여요.

그러나 때론 나를 억지로 끌어다 그 앞에 서보게 하는 것도 필요하겠습니다.

'어른'이니까요.

온실 속에서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사람들만 만나면 좋겠습니다만,

단순히 입고 먹고 자는 것에만 충실하면 머리 아플 일도 없겠습니다만,

지성인은 못돼도 다들 지식인은 되는 입장에서

세상에 대해 관심은 가져야 할 테니까요.

아이들에게 '너는 우리의 꿈나무'라고 부담만 줄 게 아니라요.


전쟁과 평화에 대하여.


짬뽕 한 그릇에 '휴가 잘 보냈다'고 만족할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의의를 얻어 왔네요.

마음이 향하면 일단 따라봐야겠어요.

그 뒤에 뭔가 분명히 있으니 끌리는 거 아니겠어요?

가벼이 날아와 진중한 알맹이 하나를 챙긴 것처럼요.

직감은 꽤 똘똘한 감정이에요.


그런데 가만,

오늘도 제 마음속에선 워(war)가 끊임없었지요.

핵폭탄이 떨어질 때마다 멘탈은 잔해만 남기 일쑤죠.

세계의 안정 이전에 우 제 이너 피스(peace)부터 어떻게 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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