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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의 주제는 여백

일본 - 아소(Aso)

by 다온


배낭여행의 묘미는 일정에서 자유롭다는 것인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될 때가 있죠.

기차 무제한 이용권 날짜가 박혀있을 때처럼요.


마그마가 들끓는 장면만을 위해

전 날밤에 찾아온 이 동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낀 거 있죠.

이 날의 여행객들에게

아소산은 자신의 민낯을 철저히 가렸습니다.

여기도 백두산 천지처럼

몇 대가 덕을 쌓아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그런 곳인가요?

하필 왜 오늘이람...

저는 숙소에서 만나 동행했던 독일 친구와의 담소만 남겨둔 채

버스를 타고 하산했습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요.

날씨가 다시 화창해졌습니다.

이럴 거면 아까 도대체 왜 그랬던 거야?

기차역에서 바라본 아소산은 푸르렀어요.

그런데 떠날 시간이 다 됐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올라가 볼까 싶었는데

냉정을 되찾았습니다.

즉흥도 좋지만

이 정도의 즉흥까지 용납되는 성격은 아니거든요.


이대로 남겨두자.

이대로 넘어가자.

이것도 내 여행의 한 페이지이고,

이 페이지의 주제는 '여백'이었던 거야.


그런데 몇 달 뒤,

한국에서의 어느 흔한 내 일상 속에

아소산이 폭발했다고 속보가 난입했어요.


잘 아는 어떤 곳에 사고가 난 것처럼

더 마음이 쓰였어요.

단 하룻밤 묵었고

날짜로는 단 이틀을 거닐었을 뿐인데

그때 그 모던하고 친절하던 백패커스의 안부도 궁금하고

아담하던 동네 구석구석도 생각났어요.

다들 큰 탈 없으셨길 바랍니다.

여행이란 그런 것 같아요.

그 모든 게 단지 스쳐갈 뿐이란 걸 처음부터 알고 있지만

마음에 한 줄은 그어놓죠.

아무것도 안 남은 것 같아도

꺼내보면

뭐라도 나오더라고요.


오늘 저의 입꼬리는

그 가느다란 추억을 먹고

살짝 더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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