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쌍둥이라 하면 학교에서 유명인사였다.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젠 해가 갈수록 학교에 쌍생아가 늘어간다. 시험관 출산 증가가 피부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2021년에 내가 가르치는 학년엔 쌍둥이 세 쌍이 있었다. 일란성 여자, 일란성 남자, 이란성 남녀이고 130명 중에 6명이니 전체의 5%에 해당했다. 학부모가 원하면 쌍생아들은 같은 반에 넣어주는데 1학년이 아니고서야 자녀의 사회성을 위해 대부분 다른 반을 희망하신다. 우리의 여자 쌍둥이는 같은 반이고 나머지 두 쌍은 각각 다른 반인데 내가 그 학년 전체를 수업하기 때문에 이들의 성향들이 보이는바, 나는 인간의 고유성에 대해 무릎을 치곤 했다. 쌍생아들은 서로 정말 비슷하다. 경험상, 특히 성별이 같은 경우엔 생김새도 같고 옷도 똑같이 입고 이름까지 돌림자를 써서 외양으론 구분이 힘들지만 그들을 구분하게끔 하는 포인트들은 분명 있었다. 여학생 둘은 학교에서 전혀 말이 없다는 게 같지만 그중 언니는 내 말에 가끔씩 대답은 했다. 남학생 둘은 말투, 문제 해결 방식, 삐뚤삐뚤한 글씨체까지 같은데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이란성 남녀 학생이 쌍생아라는 걸 나는 6월이 되어서야 우연히 알게 됐는데 그러고 보니 얼굴과 적극적인 성격이 닮아있었다.
인간의 기질은 부모의 유전자와 양육방식의 영향을 크게 받는데 잉태의 순간부터 거의 같은 조건이 주어지는 유년기의 쌍생아끼리도 각자를 각자이게 하는 면들이 있는 걸 보고 나는 타인 사이의 강, 그 간극의 당위성에까지 도달해보았다. 지난 한 주간 몇 가지 일들로 내 인류애가 한 움큼은 사라진 상태라 평정심이 갈급한 내 자아가 부리나케 사고의 수레바퀴를 돌린 것인데 나름 효과가 있다. 아무리 '개인'과 '돈'이 최고인 세상이지만 무릇 인간이라면 갖춰야 할 최소한의 매너란 게 있다. 그런데 양심 따위에 본인을 가두지 않겠다고 결심한듯한 사람들이 왜 이리 흔한 걸까. 내 감정은 그런 현상에 대한 어이없음 절반, 내가 그 피해를 입고 있다는 억울함 절반이었다. 그런데 지금, 각자의 사고 범위 자체가 다르다고 딱 잘라 규정짓고 보니 불편감의 농도가 사뭇 달라졌다. 나와 타인 사이는 의외로 폭이 좁을 수도 있고, 거기에 징검다리를 놓아 심적 부담감을 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아래로 차가운 물이 흐른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며 자칫하단 미끄러져 불쾌함이 몸을 흠뻑 적셔올 수도 있다. 어차피 없앨 수 없는 그 틈을 메워보려는 노력도 가상하지만 현상적인 웬만한 차이들은 자연스레 흘려보내는 게 지혜임을 스스로에게 주지시키는 바다. 옳고 그름을 끝끝내 포기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면 대략 '다름'이라 여겨버리는 게 내 인간애 단속에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포용, 더 진지해지자면 체념 정도가 되겠다.
우린 모두 자기 별에서 왔다. 그 별은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가 똘똘 뭉쳐진 결과이기에 남과 다를 수밖에 없고 같은 점을 찾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다. 저 별은 나의 별이고 저 별은 너의 별이고 둘은 몇 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그래도 같은 하늘에서 빛나고 있으니 서로 응원해주지 않을 수 없다.새까만 우주를 밝히려면 '우리'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대로 살되, 타인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배려는 하면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