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너의 생명력에 감탄한다

사막에서 식물 키우려다 실패한 이야기

by 다온

2월 21일, 나는 5~7학년과 현장 학습(Field Trip)을 갔다. 교육청에서 빌려준 대형 버스 두 대에 학생들과 교사들을 간신히 다 태워 학교를 출발했고, 한가한 2차선 아스팔트를 두 시간 정도 달리니 도로 양쪽으로 옥수수밭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우리는 미리 섭외해 놓은 옥수수 농장(Maize Farm)에 도착했다. 농장은 대규모로 운영되어 농장주 외에 직원도 여러 명 있고 농업 교과에 나오는 농기계들도 많았다. 농장 직원은 옥수수의 파종 시기부터 재배 방법, 수확까지 자세히 설명을 했고 학생들은 공책에 열심히 받아 적었다. 나는 젊은 농장주에게 어떻게 이렇게 큰 농장을 운영하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보츠와나 청년층의 농업 기피가 심각하여 정부가 지원책을 펴고 있고 자신도 그 혜택으로 농장을 한다고 했다. 수입은 적고 일은 많아서 힘들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한국의 농촌 현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보츠와나는 인구도 적고 식량 생산량도 적은데 농사를 지을 사람까지 없으니 식생활 인프라가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 답답한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눈앞에 펼쳐진 옥수수의 녹색 푸르름은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사람들을 따라 농장 이곳저곳을 견학하는데 내딛는 걸음마다 운동화 속으로 모래가 들어와 쌓이고 먼지가 많이 났다. 작물이 뿌리내린 땅은 완벽하게 고운 모래밭으로, 이런 땅에서도 굳건히 뿌리내린 옥수수의 생명력에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2019.2.21. 현장학습 갑니다. 버스가 꽉 찼네요
2019.2.21. 하늘과 구름과 대지와 부시. 버스 창밖으로 펼쳐진 이 풍경을 맘껏 즐겼습니다
2019.2.21. 학생들은 설명을 공책에 열심히 받아 적습니다
2019.2.21. 농기계 사용 모습을 보고 있어요
2019.2.21. 옥수수(Maize)는 이런 땅에서도 자라나는 강인한 작물이군요

그로부터 5개월 뒤 어느 날, 나는 내가 먹을 풀을 한 번 길러 보기로 했다. 나는 풀떼기를 좋아하는데 동네 마트에는 그런 것을 팔지 않았다. 양배추 외에 파란잎을 가진 채소가 없었다. 신선한 잎채소를 구하려면 세척된 샐러드용 패키지를 수도의 큰 마트에서 사 오는 방법이 유일한데, 한꺼번에 사다 놓을 수가 없으니 한 달에 몇 번 수도에 갈 때마다 사다 먹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나는 물만 주면 잘 자라는 상추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보츠와나에 온 지 반년도 더 지나서야 동네 마트에 씨앗을 사러 갔다. 그런데 수도에선 팔던 상추씨가 거기엔 없었다. 마음먹은 김에 뭐라도 심어보려고 나는 다른 씨앗 봉투들에 적힌 설명을 읽어본 후, 왠지 잘 자랄 것 같이 보이는 시금치(Baby Spinach)로 골랐다. 식물 재배에 대한 애정과 지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오직 먹부림으로 나의 일이 시작됐다.


눈에 보이는 사방의 토양은 수분이 완벽하게 0%인 듯한 모래뿐이라 애초에 식물이 자랄 수 없는 조건이다. 그렇다고 어디서 거름흙을 파는 것도 아니라 나는 어떻게든 이 모래가 물기를 머금게 해야 했다. 나는 가장 먼저,화분으로 쓸 5L 생수통 네 개의 윗부분을 잘라냈다. 그리고 각 통의 절반을 먼지 펄펄 나는 모래로 채운 후, 물을 가득 부어 놓았다. 다음날, 고여 있던 물이 모래 속으로 흡수되자 나는 손가락으로 홈을 파고 그 안에 씨를 심었다. 처음엔 씨앗을 한 구멍에 두 개씩 넣다가 씨앗이 많이 남길래 나중엔 막 흩어 뿌렸다. 다 죽고 이 중에 반의 반만 살아도 성공이라 생각했다. 4일이 지나니 한 화분에서만 싹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밤에 싹이 살짝 보이는 것 같더니 하룻밤 새 정말 신기하게 쑤욱 길어졌다. 나머지 세 통은 감감무소식이다. 또 3일 뒤, 우열한 한 통의 싹들은 쑥쑥 크고 있고, 나머지 통들에서 드디어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 똑같은 조건에서 키우고 있는데 왜 한 통만 빨리 잘 자라는 걸까. 신경이 쓰이지만 나는 그냥 물이나 주며 계속 기다려 보기로 했다. 땅을 뚫고 나오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렇게 일주일이 또 지나도록 씨앗들은 각기 다른 속도로 계속 자라났다.


그러다 8월 31일, 심은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나는 이것들을 다 내다 버렸다. 키가 많이 자랐지만 옮겨 심을 데도 없고, 양분이 될만한 것도 없고 내가 이 싹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물 주는 것인데, 이제는 물을 주면 모래가 단단해졌다. 그리고 시금치는 어느 정도 키가 크자 더 이상 성장에 진전이 없었다. 오히려 말라갔다. 한 달을 기다린 나에게 이것은 좌절이었지만, 사실 실패를 전혀 예상 못했던 게 아니라 비교적 빨리 담담해졌다. 어떻게 보면 모래에 싹을 피운 것 자체가 기적이고, 마른 땅에서 물만 먹고 한 달이나 버텨준 이 시금치들이 대단한 것이었다. 먹으려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결국 거기까진 못하고, 나는 식물 재배 일지만 남기게 됐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보츠와나의 나무들은 왜 오직 부시뿐인지, 왜 식량의 거의 전부를 남아공에서 수입하는지, 왜 농사짓는 땅은 오직 옥수수 밭인지, 왜 다들 소만 키우는 건지, 왜 식재료와 음식이 그렇게 단순한지를 실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영토가 좁긴 해도 토양이 비옥해 그동안 풍족히 농사지어 먹고 살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어 감사했다.

2019.7.31. 마트에 씨앗을 사러 갔어요
2019.7.31. 모래에 습기를 주려고 물을 가득 부었어요. 씨는 내일 심을 거예요
2019.8.7. 한 통에서만 쑥쑥 크네요
2019.8.20. 물만 주면서 키우는 중이에요
2019.8.31. 다 시들었네요. 잘 가, 시금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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