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서로에게 꽃이 되어볼까

상냥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너와 나 사이

by 다온

내 이름은 한글로도 영어로도 간단하고 읽고 쓰기 쉽다.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배울 때 사람들은 보통 영어 이름을 만들어 쓰는데 나는 그게 영어 학습에 어떤 효과인지도 모르겠고 나에게 어울리는 새 이름을 찾는 것도 어렵고, 생긴 건 누가 봐도 한국인인데 지극히 서양적인 이름을 굳이 갖다 붙이는 게 이상해 보인다는 어떤 미국인의 말도 일리 있다고 생각해서 항상 본명 그대로를 써왔다. 이름(First Name)에 대한 애착이나 자부심이 있어서는 아니고, 다른 국가에서도 쓰이는 이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발음이 쉽기 때문에 나는 외국 어디에서도 내 이름 석자를 불편 없이 써왔고 보츠와나에서도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보츠와나 교육부와의 오리엔테이션 때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사람들은 우리의 세츠와나 이름을 물어봤다. 외국인들도 자신들의 모국어로 이름을 만드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세츠와나 이름에는 뜻이 있는데 동료들은 한국에서 연수를 받을 때 자기가 원하는 뜻으로 이름을 정한 상태였고, 그 연수에 참석하지 않은 나는 만들 기회도 없었지만 굳이 가명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이름을 무조건 만들어야 하는 분위기임을 현지에 와서야 파악한 나는 빨리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고민 끝에 가장 처음 추천받은 '리세호(Lesego)'로 결정하게 됐다. 리세호의 뜻은 ‘행운(Luck)’이라, 올해 운을 차곡차곡 쌓아 내년에 귀국해서 큰 복을 받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절로 하게 됐다. 의미 부여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거구나. 이름을 작명소에서 받아오는 사람들의 심리를 알 것 같았다. 교장선생님은 공문서에 리세호를 내 중간 이름(Middle Name)으로 쓰셨다. 그렇게 나는 보츠와나에서 Yuri Lesego Kim이 되었다. 누가 이름을 물어보면 나는 항상 '리세호'라고만 했고, 그럼 사람들은 더 반겨주었다. 내가 세츠와나를 못하기 때문에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과는 대화가 불가능했지만 그들과는 '리세호' 한 단어로 서로 웃음은 주고받을 수 있었다. 왜 세츠와나 이름을 만들어야 했는지 사람들을 직접 만나다 보니 그 이유와 효과를 알게 됐다. 세츠와나 이름은 현지인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마법 같은 단어였다. 누군가는 나를 레쉬(Lesh)라고 불렀다. 리세호의 줄임 표현이라고 했다. 발음상 Lemon의 '레'와 Fresh의 '쉬'가 합쳐진 것 같아 싱그럽게 들렸고 나는 그 어감이 참 좋았다. 그래서 누군가 힘차게 "하이 레쉬 (Hi, Lesh)!"라고 인사해주면 기분이 정말 상쾌해졌다.


학교에서 나를 부르는 공식 명칭은 미스 킴(Ms. Kim), 마담 킴(Madam Kim), 마담(Madam)이었고 대부분 미스 킴(Ms. Kim)이라고 불렀다. 젊은 직원들 중에는 가볍게 킴(Kim)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았는데 초반에는 학생들도 하나같이 '리세호', '킴'이라고 했다. 선생님 이름을 막 부른다고? 멀리서도 내 이름을 크게 외치며 인사를 건네는 학생들의 마음은 정말 고마웠지만 우리는 일 년을 수업에서 만날 사이이니 호칭 정리가 필요했다. 다른 선생님들을 부를 때처럼 나를 부를 때도 성(Surname) 앞에 미스(Ms)를 붙여서 불러 달라고 말하기를 세 달째, 나는 그제야 전교생으로부터 미스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올해는 방학 때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들만 나를 Yuri라고 불렀다. 보츠와나 사람들은 Lesego나 Kim으로, 한국인들은 '선생님, 언니, 누나'로 불렀기 때문에 보츠와나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보츠와나 이름이나 영어식 호칭도 아니고, 직업 타이틀이나 나이에 기반한 한국 특유의 호칭도 떼고, 내 원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게 이렇게 색다른 느낌일 줄이야. 츠와나에서 항상 홀로 지내던 내 옆에 누군가 다가와 '유리야'라고 한국식으로 다정하게 불러줬다면 더 특별했을 것 같다. 몇 년 전 어떤 선배님이 아내분의 전화번호를 저장하실 때 성함 석자로만 입력하시길래 "이름을 너무 남처럼 저장하시는 거 아니냐"며 웃었던 적이 있다. 나는 가족 관계가 드러나는 어떤 타이틀이나 애칭, 이름 옆에 적어도 하트 표시 하나는 넣어야 하지 않냐고 말했었다. 그런데 어떠한 호칭도 배제한 본인 이름 자체가 주는 정체성이 크다는 걸 새삼 느끼다 보니, 갑자기 그때의 일이 떠오르며 "이름이 그거니까 그렇게 해놨지"라며 당연하게 얘기하시던 그분의 말이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보츠와나에서 8개 반, 220여 명과 수업을 했는데 이름과 얼굴을 정확히 매치할 수 있는 학생들은 열 명도 안 됐다. 이 학생이 몇 학년 몇 반 인지는 알아도 이름은 몰랐다. 이름이 'Prince', 'Rosemary' 같은 영어 단어이거나 'Losika(로시카)', 'Seneo(세네오)' 같은 쉬운 발음이 아닌 이상, 나는 세츠와나 이름 철자를 보고도 읽지 못했고 읽어도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학생들의 이름을 외워서 불러줘야겠다는 건 진작에 포기했었다. 사실 수업 중에는 내가 계속 돌아다니면서 학생들의 학습을 가까이서 체크하기 때문에 이름 부를 일이 없고 학교에서 학생들의 이름을 몰라서 겪은 불편도 없어서 외울 필요성을 못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교실 게시판에 각 반 별로 붙여놓은 학생들이 자기소개를 가끔씩 훑어본 게 효과가 있었는지 세츠와나 이름들이 눈에는 익숙해졌고, 자신의 이름을 들고 환히 웃으며 포즈를 취해준 학생들 개개의 사진 덕분에 나는 그들을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학교에 남은 내 사진이 없으니 학생들은 시간이 지나면 내 모습을 잊어버리겠지만 미스킴 세 글자는 조금은 더 기억해주지 않을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처럼,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그 이름을 상냥하게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사는 세상은 그 은은한 꽃내음에 더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교실 게시판을 가득 채운 자기 소개 쪽지들이에요


3학년 학생들의 환한 미소에 행복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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