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내가 보츠와나에서 가장 좋아했던 동물은 당나귀였다. 슈렉에 나오는 동키와 완전히 똑같이 생겼고, 정말 귀여웠다. 나는 걸어 다니는 당나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운전 중 도로가에서 지나칠 때도, 우리 집 앞에서 봤을 때도, 가게 앞에 오래 쳐다보고 있을 때도 이들의 가만히 서있거나 가만히 앉아있고, 그 자세로 눈만 꿈뻑이고 있거나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서 더 실물 크기의 인형처럼 보였다. 어떻게 보면 무기력하고 게을러 보이는데, 인간을 포함하여 보츠와나 사막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의 에너지가 고갈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반갑고 웃음이 절로 났다. 우리 집 울타리 옆에 서서 자다가 눈을 뜬 동키들은, 지각할까 봐 뛰어가고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인상을 쓰고 물이 안 나와서 울상이고 힘이 없어서 축 늘어져있는 나를 보며 '인생 뭐 있어? 뭐가 그리 심각해? 단순하게 살아'하고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듯했다. 늘 여유가 풍년인 당나귀들을 떠올려보면, 나도 곧 숙면에 들 수 있을 것 같은 평온이 왔다.
둘. 액자만 갖다 대면 그림이고, 마치 내가 세트장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그 공간을 동화의 한 페이지로 착각하게 하는 주인공이 있었으니, 바로 뒷집에 사는 거위들이었다. 이들은 당나귀만큼이나 내게 노스탤지어를 품게 했다. 집 밖을 나설 땐 항상 단체로 소풍을 가듯 한 줄로 뒤뚱거리며 걸어갔는데, 그건 분명 안데르센 동화에서 봤던 삽화의 한 장면이었다. 그림책은 현실에서 영감을 얻는 거구나.
셋. 우리 학교에는 나만 보면 수줍음이 폭발하는 4학년 여학생이 있었다. 교복 치마를 입어서 그렇지 보통의 여학생들처럼 머리카락을 길거나 땋지 않고 짧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어 남학생으로 오해하기 쉬웠다. 나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내추럴하고 깔끔한 스타일을 선호하기 때문에 이 여학생의 짧은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아프리카 여성들은 자신의 곱슬머리를 드러내기보다는 긴 생머리 가발을 쓰거나 일부라도 머리 장식(Hair Piece)을 하는데 이 더운 날씨인데 머리에 한 겹을 더 씌우면 얼마나 더울까. 사람들은 평소에 머리를 감지 않기 때문에 가려우면 손바닥으로 머리를 탁탁 치거나 볼펜 등으로 가발 사이를 찌르는 방식을 썼다.
우리나라는 추석날인 9월 13일 금요일 아침, 나는 출근길에 멀리서 이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고개를 휙 돌리고 직진을 하는 것이었다. 다른 학생이었다면 나도 그냥 지나쳤을 텐데 이 친구는 뭐가 그리 쑥스러운지 항상 내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다시 눈이 마주치길 기다렸고 역시나 몇 초만에 다시 나를 쳐다봤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웃으며 “Hello” 했더니 그제야 한가득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는 인사도 없이 다시 직진을 하길래 내가 기어코 “Say Hello to me”라고 했고, 그 친구는 작은 목소리로 “Hello”라 말하고 더 빠르게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한눈에 봐도 머리가 더 짧아졌길래 나는 그 걸음을 따라잡아 말을 걸었다.
- 머리 잘랐니?
/ 네.
- 언제?
/ 어제요.
- (엄치 척하며) 오, 예쁘다!
내가 유명 연예인도, 대단한 인물도, 그렇다고 공주같이 예쁜 모습으로 관심을 받는 사람도 아닌데 누군가에게 이렇게 떨리는 대상이 되다니 황송할 따름이었다. 이것은 내가 외국인이라서, 선생님이라서, 낯선 사람이라서 등의 버프를 연관시킬 수 있겠지만, 나는 무엇보다 아이의 순수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생각해보면 매일의 학교 생활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건, 계산 없이 마음을 나누는 어린이들 덕분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