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두려워한다. 나중에 자녀들이 감정적 고통이나 정신질환을 겪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녀를 엄격하게 훈육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교육방식으로 여겨진 지 오래다.
이런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 보면 프로이트가 등장한다. 유아기의 경험이 평생 심리적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비록 본인은 잊었더라도)는 프로이트의 설명은 정신 분석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프로이트의 통찰은 모든 도전적인 경험이 심리적인 상처를 줄 것이라는 확신으로 변질되었다. 그 결과 무엇인가 옳고 그름을 가르치기 보다는 감정적 상처를 받도록 하는 것을 훨씬 중시하게 되었다. 교육을 비롯해서 많은 삶의 영역에서 교훈(진리)보다는 재미(감정적 치유)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시대를 특징 짓는 키워드 중 하나는 위로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상처 받았고, 감정적으로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고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설교 역시 위로가 강조된다. 세상을 살면서 상처입고 힘들었는데 교회에 나와서라도 위로 받고 힘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해 다루기 보다는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을 휠씬 선호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과거에 비해 휠씬 풍요롭고 살기 좋은 환경이 되었다. 굶주림으로 어린 아이들이 거리로 내몰려 구걸하던 때나 산업화의 과정에서 인간의 기본권마저 보장 받지 못하던 시절에 비교한다면, 지금은 휠씬 더 좋은 환경이 되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공동체에서 쫓겨나고 온갖 불이익과 핍박(심지어 순교까지)을 당하던 시대에 비하면, 신앙을 갖는 것이 휠씬 용이해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보다 위로와 치유가 강조되는 이유는 객관적 현실보다는 치유가 필요하다는 시대적 흐름이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세상살이는 과거나 오늘이나 힘들고 고달프다. 다만 위로가 우리를 상처에 취약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스스로를 역경으로부터 과보호하려는 탓에 오히려 역경을 두려워하고 무기력하게 된 것은 아닐까. 거짓으로 칭찬하고 현실을 감추는 방식으로 자존감을 높인 탓에, 점점 참을성이 떨어지고 권리만을 찾고 자신의 성격적 결함에 무지해지는 것은 아닐까. 원하는 것들을 더 많이 소유하게 된 탓에 새로운 쾌락주의 시대를 조장하고 쾌락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을까.
교회는 사람들의 상처를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진실(진리)이 결여된 공감과 위로는 공감과 위로에 중독되게 할 뿐 참된 회복으로 인도하지 못하지 않을까 한다. 오히려 세상을 살아갈 힘은 공감과 위로가 아닌, 진실(진리)에 기반하여 아프고 힘들지만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는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