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태평한 미아의 시간

by 일로

부끄럽지만 길치입니다. 어릴 때부터 일상적으로 길을 잃고 다녔죠. 열심히 헤매고 보니 아까랑 같은 곳에 와 있다거나 어딘지도 파악 안 되는 샛길로 와버려서 지인들에게 전화로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이나 지도 앱이 없던 시절에는 더 심했죠. 중학생 시절 가끔씩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특히요. ‘전단지를 돌리다 길을 잃으면 어쩌지?’ ‘제 시간에 배달을 못가면 어쩌지?’ 같은 압박감이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그도 그럴 게 배달 주소가 죄다 ‘000-0번지’나 옆집 ‘00철물 앞 검은 지붕’ 같은 식이었거든요. 신도시가 아닌 구도심의 연립주택단지에 살면서 길을 자주 잃는다는 건 꽤나 치명적인 단점이었습니다. 눈이 안 좋은 초원의 유목민 같은 거죠. 실제로 전단지를 붙이던 중에 길을 잃어 한 시간을 넘게 헤맨 적도, 으슥한 길로 빠졌다가 동네 노는 형들에게 ‘삥’을 뜯긴 일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 길을 잃는다는 건 그 자체로 공포였습니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반사적으로 등골에 소름이 돋았죠.


근데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어느 순간부터는 그조차도 의연해지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어느 순간부터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유랑하듯 동네를 돌아다녔습니다. 억지로 길을 찾으려고 할수록 헷갈리니까 스스로 미아가 됐음을 인정하자는 생각이었죠. 그렇게 생각하면 급하게 뛰던 심장도 조금은 잦아들었습니다. 덕분에 처음 보는 놀이터의 철봉 위에 앉아 동네를 둘러보거나 해가 지는 걸 구경하기도 했죠. 새로 찾은 분식집에서 놀라운 맛의 만두도 먹어보고요.


을 잃은 곳에서도 해는 예쁘게 뜨고 진다는 걸 그 때 알았습니다. 길을 잃으면 잃는 대로 그 나름의 풍경이 앞에 펼쳐진다는 사실을요. 신기한 건 두 번째 갔을 때는 전혀 길을 잃지 않았어요. 길을 잃었을 때의 상황이 너무 생생하게 각인된 나머지 주변의 지형지물을 전부 기억하게 된 거죠.


인생도 여행도 길을 잃는다고 그게 곧 끝을 의미하는 건 아닐 겁니다. 물론 이 말을 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두렵겠죠. 하지만 전혀 다른 길로 와버린 뒤에도 새로운 풍경이 있을 거라는 걸 의식적으로 기억하려 합니다. 혹시 모르잖아요? 좋은 결말이 있을지.


생각해보면 어른이 된 이후에는 늘 가던 길만 다니며 살았습니다. 항상 큰 길을 이용해 목적지로 향했고, 그마저도 헷갈릴 때는 지도 앱을 사용했습니다. 큰 길 옆에 있는 작은 샛길들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늘 가던 곳만을 다니며 쉬는 날에 할 게 없다며 심심해하곤 했죠. 문득 길을 잃어 본 적이 얼마였는지 떠올려 봤습니다. 길을 잃는다면 좋든 싫든 더 많은 골목들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을 텐데요. 비상시에 쓸 여러 안전장치도 있고요.


해서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미아가 돼보기로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태평한 미아 말이죠. 지하철 노선도에서 제멋대로 역을 골라 근처의 동네를 무작위로 돌아다녀 볼 생각입니다. 몇 가지 원칙을 세워서요.

1. 어떤 경우에도 지도 앱을 보지 않는다.

2. 찾아갈 역과 동네에 관한 정보는 일체 검색하지 않는다.

3. 되도록 큰 길 대신 좁은 길로 들어선다.

4.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


앞으로 가게 될 곳이 어디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길에서 보게 될 것들이 무엇인지도요. 하지만 경로가 어떻든 거기에는 늘 새로운 풍경이 있을 겁니다. 제 기억에서 쉽게 잊히지 않을 그 거리들 말이죠.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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