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구청역에서 망원동까지 걸었습니다

by 일로

이번 주면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가 개막합니다. 2021-2022 시즌이죠. 매년 찾아오는 시즌 개막이지만 늘 8월 말이 되면 반갑습니다. 축구를 좋아한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꽤 오랜 시간 프리미어리그를 봐 왔다고는 할 수 있죠. 2005-2006 시즌부터 토트넘 경기를 쭉 봐왔으니까요. 대단한 계기라기보다는 축구가 길을 찾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 어느 시점부터 경기를 챙겨봤던 것 같습니다. 한쪽에서는 길을 개척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진영을 갖춰 그 길을 차단합니다. 어떤 팀은 패스 횟수를 최대한 늘려 길을 개척하고, 어떤 팀은 단 한 번의 패스만으로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어느 방법이 더 우월하다고는 할 수 없죠. 그 두 가지의 방법론이 격렬하게 충돌하던 시절에 축구를 본 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볼 때만 그렇습니다. 공을 잡는 순간 제 드리블은 곧 누군가의 발에 차단될 테니까요.


사실 축구 생각을 하고 길을 나선 건 아니었습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포구청역에 내려 지상으로 나오니 축구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마포구청역에서 내리면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위용이 한눈에 보입니다. 어느 출구에서 내려도 월드컵 경기장이 보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심지어 주변의 도로명도 월드컵로입니다. 좋아하든 아니든 이곳에 살면 무조건 축구라는 스포츠의 영향을 받겠구나 싶었습니다. 동네에 거대한 상징이 존재하는 기분은 과연 어떨지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곳의 주민이라면 굉장한 자부심을 느낄 것 같은데요. 애매한 거리로 인해 내 연고지 팀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할 필요 없이 진심으로 우리동네 축구팀을 응원할 수 있죠.


더군다나 여기는 한국 축구의 심장부입니다. 저마다 나라의 얼굴 같은 축구경기장이 하나쯤은 있습니다. 영국에 웸블리 스타디움이, 스페인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있듯이요. 그곳에서 기록하는 패배는 다른 어떤 패배보다도 굴욕적으로 다가옵니다. 때로는 중년 열성팬들의 심장마비로 이어지기도 하죠. 실제로요. (상상하기도 싫지만) 똑같은 한일전이라 해도 부산에서 지는 것과 상암에서 지는 것은 전혀 다른 심적 타격감을 줍니다. 그건 일본도 마찬가지겠죠. 우리에게 홈경기는 곧 상대에게 원정을 뜻합니다. 모든 라이벌전이 치열한 건 그래서죠. 길을 개척하고 차단하는 과정에서 수 없는 충돌이 벌어지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공은 끝내 목적지로 도착하고, 결국 승패가 갈립니다.


마포구청역에서 나와 성산동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힙하게 그라피티가 그려진 벽과 중국집을 지나 대로 옆 샛길로 들어왔죠. 야트막한 오르막이 시작됐습니다. 바로 숨이 차오릅니다. 동네 뒷산이라고 우습게 봤다가는 고생 좀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화단과 화분으로 가득한 연립주택들을 보니 6월 오후 세시의 열기가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습니다. 주택 앞에 큰 나무나 식물을 심을 수 없어서인지 유독 집 앞에는 주민들이 가꾸는 화분들이 많았어요. 바로 뒤편이 숲인데 그 앞에 또 식물을 키우는 그 욕심이 전혀 과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밤이 되면 동네 전체가 식물들이 뿜어내는 냄새로 가득할 겁니다. 날이 곧 선선해지면 매일 멋진 산책이 가능하겠죠. 밤에 날아드는 벌레가 성가시긴 하겠지만요.


동시에 집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서울 중심지를 걷던 날이었죠. 비즈니스 타운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주상복합 아파트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너무 답답해 보였어요. 마음 편히 장을 볼 곳도 없었고 단지 밖을 나오면 정신없이 차들이 지나다니고, 풀냄새 한 번 맡으러 산책을 나서려면 시끄러운 도심 한 복판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위치였습니다. 인간으로서 숨 쉴 곳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곳의 아파트지만 수 십 억원을 호가할 테죠. 저 집이 재화로서의 가치 외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저로서는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아마 평생 모를 수도 있겠죠. 제가 모르는 다른 수많은 장점들이 저 아파트에는 있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그 어떤 장점도 식물들이 뿜어내는 냄새를 맡으며 산책할 권리를 압도할 수 없다 생각합니다. 제게 있어 주택가 주변의 녹지는 물이 새지 않는 배관과 채광이 잘 되는 창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집 주변에 숲이 많다 보니 그 소중함이 더 크게 다가오기도 하고요. 살 능력도 없는 주제에 마음대로 말해 죄송합니다.



모래내를 지나 망원동 방향으로 이동했습니다. 작은 길들이지만 다른 동네에 비해서 정돈된 느낌입니다. 다른 동네에 비해 길도 넓은 편이고 구획들도 네모나게 정비돼 있습니다. 연식이 좀 된 연립주택과 전신주에 얽힌 전깃줄들이 거리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 했습니다. 경험상 오히려 이런 곳에서 길을 잃기가 쉽습니다. 이럴 때는 바로 큰길로 바로 빠져나오는 게 좋죠. 길을 잃는 즐거움으로 다니는 유랑이지만 한여름에 같은 곳을 몇 번씩 빙빙 돌면 절대 오래 걸을 수 없으니까요. 다행히 이 거리에는 오아시스 같은 가게들이 곳곳에 있어 기운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월드컵 마트’라는 가게였습니다. 얼핏보면 작은 구멍가게인데 식물부터 건어물까지 모든 걸 팔고 있었어요.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열어보니 포도맛 폴라포가 하나 보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거의 매일 먹었던 아이스크림인데 여기서 보니 반가웠습니다. 2002 월드컵 유치 캠페인이 한창이던 시절이죠. 월드컵 마트와 폴라포라니. 절묘합니다. 망설이지 않고 집어 계산을 치렀습니다.



포도맛 얼음을 으적으적 씹으니까 정신이 번쩍 드네요. 작년에 치과에서 스케일링을 받을 때 “왼쪽 어금니 밑동이 마모돼있네요. 시리지 않았어요?”라는 소리를 들었는데요. 레진 치료를 받기엔 크기가 작아서 여전히 마모된 상태 그대로입니다. 그 때문인지 얼음을 씹을 때마다 뇌에 전기충격이 가해지는 느낌입니다. 덕분에 맹한 정신이 바로 돌아왔어요.


5분쯤 더 들어가니 이번에는 월드컵 시장이라는 간판이 보였습니다. 심지어 가게마다 달려있는 간판에도 축구공이 붙어있어요. 월드컵로에 위치한 월드컵 마트와 월드컵 시장이라니. 상암동이 월드컵으로 만들어진 동네라면, 망원동은 마치 월드컵 개최를 바라는 설렘이 만들어낸 동네처럼 느껴집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2002년 월드컵 개최를 위한 포스터 그리기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동네 곳곳에 묻어있는 설렘이 전혀 생경하지 않았습니다. 시장 자체는 망원시장에 비해 한가했습니다. 단지 길 하나를 마주하고 있는데 말이죠. 어떤 길들은 단절과 구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길 밖을 잠시 벗어나도 사람들은 그 밖을 벗어나 다른 길로 접어드려 하지 않죠. 그것이 상권을 가르고 생활 반경을 규정하고 행정구역을 나누는 기준이 됩니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개인의 일상도 길이 만들어낸 틀 안에서 규정되죠. 그러나 이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도 또한 길입니다. 큰길 옆에 뻗어있는 샛길들로 발을 들이는 건 그런 의미에서 일상의 틀을 깨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미아를 자청한 것도 그래서죠.


시장을 벗어나 주택가 주변을 둘러보는데 큰 글씨로 ‘카페 포은’이라는 이름의 카페가 눈에 띄었습니다.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서 망설이지 않고 들어갔습니다. 음료를 시키려다 밑에 쓰인 커피푸딩이 눈에 띄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카페에서 푸딩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에서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가 커피푸딩을 맛있게 먹던 장면이 떠올라서였을까요. 거침없이 “커피푸딩 주세요”라고 말해버렸습니다. 예상치 못한 드리블의 연속. 그나저나 왜 이 카페는 앞에 정몽주 선생의 호를 붙였을까요. 단지 근처에 정몽주 선생의 동상이 있어서?


그러고 보니 늘 궁금했습니다. 대체 왜 여기에 정몽주 선생의 동상이 있을까. 검색해보니 정몽주 선생과 이곳과는 전혀 연관이 없었고 1970년에 한 건설사가 정몽주 선생의 동상을 지어 이곳에 옮겨놨다는 이야기만 적혀 있습니다. 생각보다 시시한 결론이지만, 그 개연성 없는 인과에 또 한 번 놀랍니다. 어쩌면 이렇게 일이 결정됐을지도 모르죠.


“저기, 부장님. 정몽주와 마포구는 전혀 연관이 없는데요.”

“아무렴 어때! 위인이잖아! 위인은 좋은 거고. 어쩌면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잖아.”



어떤 면에서 본다면 좋은 영향입니다. 소나기가 내리던 타이밍에 딱 들어간 카페가 정몽주의 호를 딴 곳이니까요. 그곳에 포은의 동상이 없었다면 아마 이 카페도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죠. 여기서 연유가 들어간 커피푸딩을 맛나게 먹을 일도 없었을 테고요. 전혀 상관없는 존재들이 얽혀서 벌어지는 생뚱맞은 일들을 좋아합니다. 개연성 없는 이야기로 들리시겠지만, 이 또한 축구 덕분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일단 길을 개척하고 전진하지 않으면 얻어낼 수 없는 결과니까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단 1cm라도 앞을 향해 전진해라. 현대축구의 기본 덕목이죠. 그리고 저는 축덕이고요.


앞으로의 여정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잃어버린 길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그곳에서 새로운 풍경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으면 하고요. 그러다 보면 변칙적인 드리블도 하게 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할 때도 생길 겁니다. 동시에 개연성이 없는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두서없는 결과 앞에서 웃을 때도 있겠죠. 그곳이 어디든 일단 나아가기만 한다면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정, 좋은 드리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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