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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Jun 13. 2024

무언가를 오랫동안 관찰해 본 적 있나요?

"열흘에 한 번, 쑥쑥이 물주는 날이야. 잊지 마!"             


아내가 미국으로 출장 가기 전, 드라이브에 스프레드시트 하나를 공유했다. 회사 선배에게 집들이 선물로 받은 여인초(일명 쑥쑥이)를 말려 죽이지 말라는 당부였다. 재택근무를 하는 아내가 쑥쑥이를 챙겨 온 덕에 나는 이 집에 식물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이케아에서 산 몇 가지 식물을 전부 말려 죽인 전력이 있던 터라 더 걱정이 됐나 보다. 걱정이 현실로 다가왔음을 깨달은 건 보름 전이었다. 물을 주기로 한 날을 건너뛴 것이다. 부랴부랴 까먹지 않게 물 주는 날 핸드폰 알람이 울릴 수 있게 설정을 바꿨다.            


그리고 며칠 뒤,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이번에는 기필코 물을 줘야 한다. 처음으로 쑥쑥이의 상태를 관찰했다. 잎 네 장이 말려 있었다. 검색해 보니 물 부족 때문이란다. 그제야 일의 심각성을 깨닫고 여인초 건강하게 키우는 법을 검색했다. 여인초는 열대 관엽 식물로 따뜻한 곳에서 서식한다. 물이 잘 빠지는 토양에서 자라고, 뿌리가 습기에 취약하다. 일주일 또는 열흘에 한 번씩 물을 주는 이유란다. 오히려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상하기 쉽다. 이러면 여인초가 아예 죽을 수도 있단다. 여인초가 잘 자라려면 일광 역시 중요한데, 반드시 간접광이어야 한다. 직사광선을 장시간 쬐면 잎이 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열흘에 한 번 물 주기, 간접광 쐬기. 음...왠지 이게 다가 아닌 것 같았다. 아내의 성격상 이걸 모르고 그냥 물만 뿌려줬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찾은 게 디시 인사이드 식물 갤러리, 통칭 ‘식물갤’이었다. 디시인사이드에는 카테고리별로 온갖 주제의 갤러리가 존재한다. 많이들 알려져 있지만 ‘갤러리’란 ‘잉여’와 ‘덕후’들의 주요 서식지다. 자극적인 글을 써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갤러리들도 있지만 곤충, 식물, 천문, 항공 등의 영역에서는 오직 관심분야만을 탐구하는 무공해 유저들이 많다. 대한민국에서 보고되지 않은 외래종 흰개미마른나무흰개미과(Kalotermitidae) 크립토테르메스(Cryptotermes) 속의 개미가 국내로 유입됐음을 알고 환경부에 신고한 것도 디시인사이드 곤충 갤러리 유저들이었다. 식물 갤러리에 들어가 여인초를 검색했다. 어렵지 않게 잎 말림 현상에 대한 글을 찾을 수 있었다. 역시 원인은 수분 부족. 하지만 며칠에 물을 한 번씩 주라는 얘기는 없었다. 대신 이런 댓글이 눈에 띄었다.         

 

“딱 며칠로 정할 수 없는 게 실내습도, 채광, 통풍, 뿌리 활착 여부, 뿌리 건강, 뿌리 크기, 잎의 장수, 해충 유무, 배수 정도, 화분 크기, 화분 재질, 화분 받침 물고임 여부 등등 엄청나게 많은 요인 때문에 ‘며칠 간격으로 한 번 주세요’라고 할 수가 없어요. 인간도 남녀노소, 활동량, 신체스펙, 기분, 건강상태에 따라 식사량이 다른 것처럼.”          


댓글을 보고 순간 ‘아차!’ 싶었다. 식물에게도 개별성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쑥쑥이를 식구로 받아들이는 연습부터 하는 게 먼저였다. 이를 위해서는 좀 더 자세히 쑥쑥이를 관찰해야 했다. 잎이 총 여덟 장 있는데, 세 장이 말렸고, 그중 한 장은 가장자리가 노랗다. 나머지 다섯 장은 비교적 건강하다. 물은 화분에서 물 빠짐을 확인할 만큼 흠뻑 줬다. 그리고 창가에서 직사광선에 한 시간쯤 뒀다. 겨울이고 일주일 내내 날씨가 흐려 오늘은 직접 햇빛을 쐬도록 뒀다. 집안 습도가 45%인 걸 고려해 매일 분무기로 습도를 조절해 주기로 했다. 다음 주에는 꽃집에 가 영양제도 살 생각이다. 사실 이렇게 한다고 쑥쑥이의 상태가 좋아지리라는 법은 없다. 더 나빠지지만 않으면 감사할 뿐. 식물 또한 엄연히 타자다. 높은 확률로 쑥쑥이는 내 뜻대로 자라주지 않을 것이다.      


가게 뒤편에 작은 텃밭을 꾸렸을 때 그걸 느꼈다. 그때 스티로폼 박스를 화분삼아 상추, 고추, 토마토를 심었더랬다. 심어만 놓으면 알아서 자랄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다. 줄기에 진딧물이 꼬였고, 잡풀이 자라났다. 비가 안 오면 잎이 타버렸고, 많이 오면 오는 대로 뿌리가 썩었다. 수확한 작물들은 마트의 것처럼 예쁘지도, 탐스럽지도 않았다. 의지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텃밭 일은 가게 일 만큼이나 손이 많이 갔다. 다행히 여인초는 손이 덜 가는 식물이다. 그럼에도 이 아이가 어떻게 회복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이 식물에게 온 마음을 쏟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쑥쑥이를 사랑하는 마음이다(너무 늦게 신경 써서 미안하다). 알랭 바디우의 말처럼 사랑은 선언이다. 사랑하기로 선언했으면, 우리는 꽤 많은 것들을 사랑할 수 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첫 번째 행동은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봄이 지속되면 이는 마침내 마음 씀으로 번진다. 시선을 통해 사랑은 만개한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우리는 상대를 위한 최선의 배려를 베풀 수 있다. 인간이 아닌 동식물에게는 관찰이 그러할 것이다. 당연히 관찰은 몰입과 집중이 필요한 영역이다. 더불어 긴 시간을 쏟아야 한다.      


생각나는 대로 관찰 기록을 남기기로 한 것도 그래서다. 그러고 보니 다른 대상을 오래도록 바라본 게 언제였더라. 쑥쑥이를 바라보면 그 자체로 적지 않은 의지가 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재하가 이렇게 말한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의지가 되는 법이야.” 의지가 되는 만큼의 사랑을 쑥쑥이에게 줄 생각이다. 쑥쑥이가 나를 의지하게 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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