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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May 23. 2024

최선을 다해 누워본 적 있나요?

토요일 아침 10시 30분. 누워있다. 잠에서 깨 있지만 그냥 누워있다. 더 격렬하게 누워있고 싶다. 동시에 밀려오는 죄책감. 이렇게 누워 있어도 되는가. 배달 앱에 메뉴 정보도 업데이트하고 세금계산서도 정산해야 하는데 몸이 안 따라준다.    

  

어제 가게 주방의 환풍기를 닦고 자정이 지나서 집에 왔다. 한 여름 주방 환풍기를 닦으면 괜히 울고 싶다. 쉬고 싶다. 누워서 숨만 쉬고 싶다. 그래도 일어나서 사람 구실은 해야지. 아, 그래서 어쩌라고! 쉬는 날이 되면 늘 자아분열에 빠진다. 두 개의 자아도 아니고 세 개의 자아가 머릿속에서 난리를 친다. 휴일이 아니면 자기 관리는 언제 할 거냐는 강박과, 이때 아니면 언제 쉴 거냐는 타박과, 내일 출근하면 분명 후회할 테니 나가서 놀라는 당부가 부딪친다.   


그래서 오늘은 어떤 자아가 이겼냐고? 일단 앓는 소리를 내면서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신 뒤 바로 아내 방으로 갔다. 그녀 역시 누워 있다. 한국어로 더빙한 디즈니 <백설공주>를 보고 있다. 둘이 어제 주고받은 카톡 내용이 떠올랐다. "음,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에도 누워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내가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그치! 그리고 지금도 누워 있지!”          


밥 먹고 산책하고 화장실 간 시간을 빼면 어제부터 다섯 시간 넘게 누워만 있다(자는 시간은 뺐다). 대단하다. 잠도 그렇게는 못 잘 거 같은데. 결혼 후에는 할 일이 많아지면서 누울 일이 줄어든 게 이 정도다. 예전엔 화장실 갈 때 빼고는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이스라엘의 정통파 유대교 신자들은 안식일에 100보 이상 걷지 않고 요리조차 하지 않는다던데, 뭔 일인지 종교도 없는 그녀는 이 율법을 정확히 따른다.      


그러면서 할 건 다 한다(대체 언제?). 게으르다기보다 태평하다. 일을 했으면 누워서 쉰다. 투입-산출처럼 그 공식이 알고리즘으로 엮여있는 사람이다. 나처럼 자기 계발이나 생산적인 휴일을 보내지 못한 죄책감 따위는 전혀 없다. 그 태평함이 언제부터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낙천적인 걸 넘어 그 이상이다. 오해는 마시길. 우리 둘 다 팔자가 좋은 인생은 아니다. 그녀라고 힘든 일이 왜 없겠는가. 그렇게 생각할수록 그녀의 배포가 더 대단해 보인다. 애초에 불안을 받아들이는 수준이 나와는 다르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뭘까? 그녀의 고민은 근미래와 현재에 한정돼 있다. 그조차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만 시선을 맞춘다. 어차피 내가 손쓸 수 없는 일은 고민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눕는다는 행위는 그녀에게 있어 좀 더 고차원적인 일이다. 지금 할 일이 없다면 누워 있자. 노력이 닿지 않는 시점까지 에너지를 투사하지 말자. 그녀에게 눕기란 주어진 휴식을 만끽하겠다는 다짐이자, 현재로서는 더 할 것이 없다는 의사표현이다.


정확히 이렇게 이야기했던 이들이 2000년 전에 있었다. 스토아주의 철학자들이다. 2000년대에 학교를 다녔고, 문과를 선택했다면 윤리 시간에 ‘이성적 사고=금욕주의’ 도식으로 외워재껴야만 했던 경험이 있으리라(당시 그 누구도 이들이 왜 이성적 사고를 주장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이들의 세계관은 크게 세 갈래로 설명할 수 있다.    

       

1. 내 의지와 노력이 미치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2. 이 세계에서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만 하는가.

3. 세상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여기서 핵심은 1이다. ‘스토아적인 수용’이라 불리는 이것은 사물의 이치(물리학)를 이해했을 때 깨달을 수 있는 지혜다. 이것을 올바로 깨달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판별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을 아는 첫걸음이다. 이 이치를 안다면, 소망과 현실을 혼동하는 우를 막을 수 있다.     


현시대는 쉬는 것을 생산을 위한 예비행위로 치부한다. 다른 경쟁자들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고 끊임없이 겁을 준다. 그 앞에서 불안함을 느끼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될까. 하지만 스토아주의에 비춰보면 이런 두려움은 부질없는 것이다. 다가올 위험요소가 뭔지 특정되지 않았고, 이를 대비해 뭘 할 수 있을지 막연하기 때문이다. 지향점과 목적 없이 막연한 불안감으로 하는 자기 계발은 위험하다. 이런 ‘갓생’은 피해야 번아웃을 막을 수 있다. 경험하건대 불안을 없애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조금 다르게 보려는 시도다. 행복이 행동이 아닌 마음가짐에 있듯이.      



그러니 전날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잠깐 좀 누워보자. 어떻게? 베른트 브루너가 쓴 <눕기의 기술>에서 저자는 태국 와포 사원에 있는 관음보살상의 포즈를 가장 완벽한 눕는 자세로 추천했다. 왼편으로 누운 뒤 왼손으로 머리를 받치는 포즈다. 위장이 바닥으로 향하는 포즈라 역류성 식도염 환자들도 편하게 누울 수 있다. ‘내가 지금 누워 있어도 되나’ 싶다면 스토아 철학자들의 사상을 떠올리자. 결국 완벽한 눕기란 스토아주의자처럼 생각하며 관음보살처럼 눕는 것이겠다.       


아내가 백설공주에 빠져 있는 사이, 스토아주의자처럼 생각하는 관음보살의 자세로 소파에 누워봤다. 다들 놀러 나갔는지 아파트 단지는 적막하기 짝이 없다. 화단 앞은 까치와 직박구리의 놀이터가 됐다. 뭔가 다 내려놓았다는 생각 때문인지 해방감이 느껴졌다. ‘에라! 모르겠다, 배 째!’하고 눕는 것도 가끔은 필요하구나. 경험하고 말하건대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지향점이 명확히 있다면 모를까, 불안함에 휘둘리는 ‘갓생’보다는 "지금은 누워있는 게 최선이오" 하고 누워버린 스토아주의자가 낫다.      


물론 번아웃 직전의 ‘갓생러’라면 쉬는 데에도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불안의 원인이 ‘나는 지금 멈춰 있다’는 인식에서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관성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정말 번아웃에 빠질 수 있다. 누워 쉬는데도 훈련이 필요한 이유다. 찾아오지 않는 일들을 걱정하지 않는 것.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휴식에 몰입할 것. SNS 속 ‘갓생러’의 피드 따위 보지 말 것. 마지막으로 눕기를 무시하지 말 것. 눕기는 근육 이완과 긴장 해소에 좋다. 누워만 있어도 남는 장사라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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