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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May 16. 2024

최근에 멍 때리기 해 본적 있나요?

쉬는 날 오후 세시. 카페에 혼자 있었다. 핸드폰에는 손대지 않겠다는 나름의 규정에 충실했다. 덕분에 책 한 챕터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하품이 밀려왔다. 눈앞에 있는 커피잔이 두 개로 보이면서 머릿속에 망상 스위치가 켜졌다. 평소 가고 싶었던 성수동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상상을 했다가, 뜬금없이 누군가의 북 콘서트에서 질문을 하고, 실제로 그가 했는지 아닌지 확인이 안 되는 답변을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배경이 축구장으로 바뀌었다. 눈부신 조명과 압도적인 관중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나는 지금 어디지? 관중석이 아니다. 피치 위다. 하늘색 유니폼? 이거, 맨체스터 시티 유니폼이잖아! 케빈 데브라이너가 필 포든이 나 보고 손짓한다. 수비수 사이로 침투할 테니 빈 공간에 패스를 하라는 메시지였다. 나는 오른편 하프스페이스에서 패스를 찔러줬다. 수비수 두 명이 포든에게 붙었다. 내가 뛰어 들어갔다. 포든이 다시 패스를 내줬다.


반대편에서 엘링 홀란드가 뛰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아웃프런트 킥으로 비야를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다이빙 헤딩! 골키퍼가 반응하지 못한다. 후반 추가시간에 골이다. 데브라이너와 홀란드가 나에게 달려온다. 우리가 이번 시즌 챔피언스 리그의 왕자다! 경기가 끝난 후 믹스트존에서 인터뷰한다. “내 꿈은 대한민국이 월드컵에서 우승 하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저는 이미 많은 것을 이뤘습니다.” 그리고 정전. 뭐야 이게?  


그때 손에 든 빨대를 떨구면서 망상에서 벗어났다. 시간은 세 시 반. 무려 30분 가까이 전원이 반쯤 나간 상태로 있었다. 천하의 쓰잘데기 없는 의식의 흐름이었네? 하하. 망상이지만 짜릿하다. 하지만 이번엔 너무 나갔어전두엽아. 멘체스터 시티? 챔피언스리그 우승? 대한민국 월드컵 우승? 다음에는 보라카이 해변에서 모히또에 칠리 랍스터를 먹는 망상을 하고 싶단 말야. 내 무의식, 제발 부탁한다.


인간의 내면은 늘 요동친다. 가만히 있으면 여러 망상이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의식이지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간다. 이를 억지로 가로막거나 통제하려는 순간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 흐름 속에는 즐거움도 있고 분노와 슬픔도 있다. 개중에는 기억하기 싫은 기억들도 있다. 그래서일까. 많은 이들이 의식 속 번잡함을 잠재우고자 참선과 명상에 도움을 청한다.   


이 지점에서 <동물들의 침묵>을 쓴 인문학자 존 그레이는 뜨끔할 지적을 한다. "동물에게는 침묵이 자연적인 휴식의 상태이지만 인간에게는 내면의 소동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다.“ 동물들은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늘 평온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번잡한 의식을 가진 인간만이 내면의 평화를 갈구한다. 갈구하면 평화가 찾아올까? 천만에! 군 시절, 점호 시간에 장병들의 정신건강을 신경 쓰겠다며 몇 개월 간 ‘명상의 시간’을 도입한 적이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심호흡을 하면서 머리를 비우려고 하는데, 소녀시대의 태연, 내일 먹게 될 종교행사 간식, 그리고 휴가 때 만날 ‘썸녀’만 떠오르더라.  

         

뇌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인간의 요란한 내면은 비집중 회로의 활성화 때문이다. 뇌 속 네트워크는 크게 집중 회로와 비집중 회로로 구성돼 있다. 말 그대로 집중 회로는 특정한 일을 집중적으로 처리할 때 활성화된다. 비집중 회로는 집중 대상 외의 여러 정보들을 취합하고 정리한다. 이렇게 말하니 두 회로가 따로 작동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집중하고 있을 때도 비집중 회로는 작동한다. 반대로 산만한 상태에서도 집중 회로는 작동한다.  


누군가가 발라드를 부른다고 했을 때 음의 높낮이와 성대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건 집중 회로의 몫이다. 그동안 비집중 회로는 몇 해 전 실연의 경험을 떠올린다. 기술적 해결은 집중 회로가, 상상과 감정 이입은 비집중 회로의 영역인 셈이다. 밀린 설거지를 하다 무의식적으로 다른 상상을 하게 되는 것도 이 두 회로가 교차한 결과다.


하버드대학교 정신의학과 의사 스리니 필레이는 자신의 책 <멍 때리기의 기적>에서 비집중 회로가 활성화되는 순간들을 최대한 활용하라고 조언한다. 비집중 회로가 활성화되면, 잔뜩 긴장한 집중 회로가 잠시 숨을 돌린다. 그 사이에 여러 의식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아이디어들이 재결합되거나 새롭게 정의되기도 한다. 창의력이 창발하는 순간이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얻은 깨달음도,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에서 영감을 얻은 것도 비집중 회로의 활동이 기존의 지식과 결합한 덕분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삼겹 쌈밥이나 크로플도 기존의 지식들이 결합돼 만들어진 창작물이다. 멍 때리기는 창의성과 깊이 결부된 행위다. 그렇게 탄생한 아이디어가 삶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어쩌면 그 아이디어가 당신이 묻어 놓은 주식이나 코인보다도 더 크게 터질 수도 있다.  


    

여기엔 딱히 비용도 노력도 필요 없다. 혼자 낙서를 할 만한 노트를 식탁이나 책상에 갖다놓자. 그리고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여유를 만끽한다. 손에 볼펜이나 샤프가 있으면 더 좋다. 하염없이 공원을 거닐어도 좋다. 반쯤 영혼이 나간 표정으로 연필을 돌리면서 낙서 몇 번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멍 때리기의 세계로 들어간다. 나머지는 의식의 세계가 알아서 당신을 인도한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가 생긴다. 그러니까 멍 때릴 시간을 확보하라는 얘기인가요? 아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위해 시간을 내지 말자는 얘기다. 우리의 정신은 이미 2분할 운동을 끝낸 보디빌더와 같다. 잠시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의식은 스스로를 회복시키고 고갈된 정신력을 채울 것이다. 스리니 필레이는 자신의 책 마지막에 이렇게 적고 있다. 자신을 용서하는 훈련을 하자. 그리고 힘을 빼자. 우리에게 연습이 필요한 건 사실 이 지점이다.    


그리고 여기서 앞서 말한 존 그레이가 한 번 더 소환된다. 우리가 배워야 할 건 바로 옆에서 놀고 있는 강아지와 고양이, 그리고 창밖의 참새와 까치라는 사실을. 때로는 태어난 김에 살아갈 줄도 알아야 사는 게 즐겁다. 내 생각엔 그게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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