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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May 02. 2024

당신이 기억하고 싶은 소식은 뭔가요?

식당 사람들은 오후 세 시에 밥을 먹는다. 이 시간에 밥을 먹는 것에 딱히 불만은 없다. 하루 중 제일 재미없는 시간이라는 것만 빼면. 그중 제일 재미없는 게 식당 한 구석에서 혼자 떠들고 있는 TV다. 케이블 채널에선 이미 본 예능 프로그램이 네 번 다섯 번 반복해 나온다. 뉴스 전문 채널을 틀면 교수나 연구소장, 군수나 지자체장 등이 시사프로에 나와 15분씩 일장연설을 풀어놓고 있다. 그다음은 끝도 없이 나오는 건강식품과 보험광고.           


이해는 한다. 예능프로든 뉴스든 새로운 걸 생산할 시간이 필요하고, 일종의 시간 때우기 용 편성이 필요하다는 걸. 하지만 너무하다 싶은 느낌도 있다. 세상 모든 재미없는 것들을 그 시간대에 틀어주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런 불만을 가진 사람이 나 말고 꽤 있어서일까. 언제부터인가 종합편성채널을 중심으로 사건사고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전면 배치됐다.     


그 프로그램들이 다루는 사건들이란 대부분 이렇다. 귀찮다는 이유로 에어컨 실외기 지지대에 나사를 두 개만 박고 나 몰라라 한 설치기사. 계란프라이를 안 해줬다고 어머니를 때려 숨지게 한 패륜아. 남편에게 먹고 남은 배달음식으로 찌개를 끓여 주다 이혼소송까지 간 아내 등등. 같이 일하는 여사님들은 “어머 어머!” “쯧쯧쯧!” 하며 고도의 집중력을 보인다. 여사님들이랑 딱히 할 말 없이 어색하게 같이 밥을 먹는 것보다는 나을 거 같아서 틀고는 있는데, 그로 인한 민망함과 ‘현타’는 순전히 내 몫이다.           


사실 이건 비단 TV만의 얘기가 아니다. 핸드폰을 들고 SNS로 도망쳐도 마찬가지다. 은행 돈 1억을 횡령한 창구 직원의 최후. 커뮤티니에서 논쟁 중이라는 식당 사장의 태도. 태풍이 와서 무단으로 출근을 안 했다는 신입사원과의 언쟁 등이 자꾸 추천 피드로 올라온다. '이 게시물이 나를 불편하게 함'을 수 없이 눌러도 도무지 개선이 안 된다(심지어 더 엉망진창인 내용의 피드가 올라온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그냥 재미없게 살기로 했다. SNS 앱부터 지웠다. 종합편성채널 사건 프로그램들과도 연을 끊었다.     


창대한 시작. 딱 사흘 가더라. 지루했다.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식사시간을 빼면 이 식당에서 온전한 의미의 휴식시간은 없다. 손님이 없어서 한가한 건 대기시간, 즉 일거리가 없는 노동시간일 뿐이다. 한마디로 '뻗치기'다. 진득하게 앉아서 공부를 할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 밖에 나가 잠시 바람이라도 쐬고 싶지만 언감생심이다. 그 사이에 손님이 오거나 배달주문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실제로 자리를 비우면 꼭 난감한 일들이 생긴다).      


그렇다면 그 대기시간에 뭘 하겠는가. 결국 리모컨을 쥐거나, 핸드폰을 쥐거나. 두 가지 선택뿐이다. 결국 제목과 리드만 읽어도 불쾌함이 치솟는 세계로 다시 투신한다.      


재밌지 않은가. 내 생활 반경은 집과 가게가 고작이다. 아침에 가게로 출근하면 밤 10시나 되어서야 밖을 나선다. 이제는 꿈의 배경도 집 아니면 가게다. 이렇게 좁디좁은 인생을 사는 인간에게조차 세계는 무한대로 확장돼 있다. 얼핏 들으면 아름다운 말 같지만 곱씹어보면 소름이 끼친다. 손 하나만 까딱하면 온 세상의 정보가 거름망 하나 없이 쏟아져 들어온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 알아야 할 이슈들이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소식들과 소음들로 인해 절박한 자들의 절규가 가려지는 것 또한 사실 아닌가. 개인에게 유입되는 정보와 소통의 양이 과도할수록 여론은 빠르게 피로감을 느낄 것이며, 오래도록 고민하고 토론해야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한 집중력 또한 약화될 것이다.      


무엇보다 SNS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시선을 구속당한다. 자신의 일상을 스스로 오롯이 바라볼 기회와 시간을 빼앗긴다. 내면을 채울 시간과 기회가 그렇게 사라진다. SNS 속 개인들은 내면을 채울 시간을 빼앗긴 채 기계적으로 말과 사진을 전시한다. 그것이 데이터를 생산하고 누군가의 경제적 이익을 창출한다. 자신도 모르게 생산과 소비의 틀에 편입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점차 소진된다. 사회적 고민거리는 토론 대신 환멸과 염증의 대상이 된다.


정보 번아웃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다. 장기간에 걸쳐 해결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 같은 사람들은 SNS가 짜놓은 무한 스크롤을 올리며 시간을 낭비할 것이고, 굳이 알아야 할 필요 없는 소모적인 기사에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내가 받는 것은 당신의 응답이 아니에요. 있는 건 항상 나의 말뿐이었죠. 하지만 나는 채워져요. 무엇으로 채워지는 걸까요."      


존 버거가 쓴 소설 <A가 X에게>에서 주인공 아이다가 애인인 자비에르에게 쓴 편지의 일부다. 약제사이자 활동가인 아이다는 테러리스트로 이중종신형을 선고받은 자비에르의 연인이다. 그에게 선고된 이중종신형은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복역한 형기만큼 그 시신을 구속하는 형벌이다. 심지어 교정 당국은 두 사람이 혼인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면회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두 사람에게 선고된 영원한 이별. 편지는 둘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아이다는 멈추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자비에르에게 써 부친다. 내가 오늘 겪은 일들. 당신이 겪었을 일들. 참혹한 세계 속에서 서로가 겪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 누군가에게 전시되지 않고, 타인의 그 어떤 참견도 침투할 수 없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을 써 내려가며 그녀는 자신이 채워지고 있다고 말한다.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다니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전시에서도 둘은 세상이 알아주길 강요하는 정보나 선전에 파묻히지 않는다. 서로가 알고 싶고 알려 주고 싶은 것에만 집중하며 일상의 중심을 잡는다. 그들에게는 이 역시 세상을 향한 저항이 아니었을까. 오롯이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시선을 두고, 바라보며, 기억하고,  기록한다는 점에서.      


내가 기억하고 싶은 오늘의 일은 무엇이었을까. 집에 돌아온 나를 반겨주는 동반자에게 전해줄 내 일상의 소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SNS 무한 스크롤에 시선을 빼앗기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정작 내 삶의 주인으로서 기억해야 할 일상의 사건들을 흘려보내고 있던 것은 아닌가. 오롯이 나의 시선으로 바라본 오늘의 세계는 어땠나.  

    

집에 오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잠시 되뇌었다. 떠오르는 몇 가지 일들. 문장으로 쓰기엔 뭔가 낯이 간지러워 메모장에 날짜와 키워드를 남겨놓았다. 오늘만큼은 내가 걸으며 느끼는 것들이 이 세상의 전부이기를 바라면서.       



2024.04.22     


어제 산 유기농 초콜릿.

드디어 뜯어서 먹어봄.     

맛있다.

비가 와서 바람이 시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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