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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Apr 25. 2024

온몸으로 지루해 본 적 있나요?

마음에도 관성이 있는 걸까. 3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일을 10년 동안 하니 안절부절못하는 게 본래 성격처럼 됐다. 나도 모르는 새 일할 때의 성격이 일상을 잠식했다. 늘 초조하다. 허겁지겁 일을 해치웠을 때의 긴장감이 휴일에도 지워지지 않는다. 막상 내 시간이 주어져도 뭘 할지 선택을 못하겠다. 운동, 배달 앱 공지 올리기, 내 방 정리, 보름 전에 보기로 한 영화, 내다 버리기로 한 쓰레기, 새로 사야 하는 치약, 치과에 전화해서 스케일링 예약하기. 잠시 누워만 있어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일곱 가지쯤 떠오른다.      


물론 이걸 당일에 다 해치우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작지 않은 압박이 느껴진다. 결국 일들을 다 해치우고, 남은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휴식시간을 건져낸다. 그렇게 얻어낸 휴식. 뭔가 불안하다. 초조하다. 통제가 안 된다. 10분짜리 영상을 진득하게 보지 못하겠다. 괜히 냉장고 문 한 번 열었다가, 바로 옆에 책 열 줄 정도 봤다가, SNS의 무한 스크롤에 빠져 시간을 흘려보내곤 한다.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은 기분. 그렇다고 효율적으로 일상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이게 다시 죄책감이 된다. 죄책감의 종착역은 히스테리다. 괜히 고집만 부리면서 할 일은 거부하는데, 막상 멍석이 깔리면 아무것도 안 하는 꼬락서니. 유튜브에 떠도는 동기부여 영상에 따르면 나는 천하의 게으른 놈이다. 자기 인생의 주도자가 돼라! 그런 영상을 보고 나면 동기부여는커녕 온갖 충고로 점철된 “~하라!” 체에 두들겨 맞아 그로기 상태가 된다. 씹지도 뱉지도 못하는 인생. 살아서 뭐 할까 싶었다.       


심리상담 당시에 이 문제에 대해 털어놨었다. 번아웃 진단을 받았던 날 상담으로 기억한다. 일을 하며 느낀 초조함이 일상을 잠식하고 있다. 이게 산만함으로 이어지고, 종국에는 죄책감으로 번져간다고 말했다. 나는 으레 “일의 우선순위를 잘 선택하세요”나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으니 욕심을 내려놓으세요”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 싶은 순간, 이게 뭔가 싶은 대답이 들려왔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장시간 일하는 분들께서 흔히 느끼는 심리상태예요.”       

  

사실이었다. 일주일을 간신히 버텨낸 뒤 얻어낸 휴일의 절반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정비시간으로 쓰였다. 정비를 다 하면 오후가 훌쩍 지나 있었다. 그제야 내가 휴일에 뭘 하고 싶었는지 하나둘씩 떠오른다. 하고 싶은 일 중에 한 개도 해내기 버겁다는 생각이 들면 급격히 우울해진다. 집에 들어가 넷플릭스나 볼까. 남은 내 시간은 반나절. 영화를 보면 여기서 절반이 또 날아간다.      


결국 영화를 틀어도 온전히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하루가 지난다. 다시 출근이다. 여파는 다음 날까지 이어진다. 내가 어제 뭘 한 거지. 이걸 쉬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시간의 압박 없이 자유롭게 한 게 한 개도 없는데? 이런 생활이 몇 개월 이어지면 머릿속 어딘가에 고여있던 스트레스의 마그마가 폭발한다. 결국 그 분노가 나를 심리상담소로 이끌었다. 어쩌면 그 이전에도 자각하지 못한 몇 번의 번아웃을 겪어냈는지도 모른다.      


철학자 한병철은 <리추얼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리추얼이 붕괴하며 사회구성원들이 점차 소진되는 과정을 짚는다. 여기서 리추얼(Ritual)은 독일어로 “삶을 더 높은 무언가에 맞추고 그럼으로써 의미와 방향을 제공하는 상징적 힘”을 뜻한다. 리추얼 강하게 작동하던 시대에서 휴식은 현대의 그것보다 신성하게 여겨졌다. 신께서는 세계를 창조한 뒤 하루를 쉬어갔다. 휴식이 따라와야 비로소 창조가 끝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휴식은 창조의 끝이자 완성이다. 종교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휴식이 곧 신성과 직결된 이유다.      


이 리추얼은 산업화와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면서 와해된다. 그의 말을 빌리면 “신자유주의 체제는 생산을 전체화한다."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은 노동자들의 삶의 틀을 재구조화한다. 이 과정에서 휴식은 생산을 위한 에너지 비축 행위로 전락한다.


우리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 즉, 비노동시간의 개념이 필요한 건 그래서다. 노동을 위한 정비의 개념으로 휴식을 바라보면 일 너머 삶에 대한 시야가 극도로 좁아진다. 유명한 퇴사 콘텐츠 유튜버 무빙워터의 말처럼 "언젠간 잘리고, 회사는 망하고, 우리는 죽는다." 결국 노동은 좋은 삶을 위한 도구일 뿐, 그 이상이 되면 삶이 잠식당한다. 모두가 현재 너머의 삶에 대해 숙고할 시간과 기회가 필요한 이유다. 나는 그게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성의 일부라 믿는다.   


비노동시간의 사회적 공론화와는 별개로, 목구멍이 포도청인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의 냄새라도 맡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내린 결론은 역할에 대한 거부다. 아예 이렇게 된 거,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반나절만이라도 다 거부해 보자. 누구나 역할이 아니라 오롯이 자신으로서 존재할 권리가 있다. 


당장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산으로 들어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빨래와 설거지, 보고서 작성을 미뤄둔 채 공원 벤치에 앉아서 새를 바라본다고 인생에 파멸이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얘기다(당신이 주말에도 계속 연락이 오는 회사에서 근무한다면, 또는 육아 중이라면 유감이다). 나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을 정비시간과 맞바꿨다. 매주 이럴 순 없겠지만, 가끔이라도 이런 시간을 내 볼 생각이다. 밀린 일은 이후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이때야말로 그런 자세가 필요한 순간이다. 


오후 두 시. 집 바로 뒤편의 공원으로 나갔다. 배달 앱 업데이트도, 공과금 정산도 잠시 패스! 집 앞에 벤치에 우두커니 앉았다. 핸드폰은 아예 꺼 둔 채 집에 두고 나왔다(아내한테는 이유를 설명하고 허락을 받았다). 까치 두 마리가 총총 뛰어다닌다. 쟤들은 심심할 때 뭘 할까. 공짜 하나 없는 세상에서 뭘 먹고, 어떻게 자고, 어디서 쉴까. 집도 절도 없는 너희들도 그렇게 잘 사는데, 나는 대체 뭐가 초조했을까.       


오래간만에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잠시 할 일을 놓고 있어도 세상은 고요하다. 한 시간 동안 하늘만 쳐다보며 멍 때리고 있을 뿐인데도 느껴진다. 초조함과 조급함이란 오직 인간이 전유물임을. 앞으로 더 많은 걸 미뤄두고 관조할 시간을 내기를, 나의 동반자에게도 이와 같은 자유를 선사해 주기를 다짐하며 산책로를 걸었다. 아무것도 한 게 없음에도 이상하리만치 후련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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