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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Apr 11. 2024

고독을 느껴본 적 있나요?

“나 없는 동안 고독을 즐기도록 해.”        

   

아내가 미국 출장 전날에 한 말이다. 무려 70일간의 출장. 심리치료 때 “혼자 있을 시간을 주는 게 필요하다”라고 들은 게 기억에 남아서일까. 자꾸 뭐만 하면 고독을 즐기라며 밖에 내보낸다. “이제는 밖에 나갈 필요도 없겠네?”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비수로 꽂힌다. 괜찮다. 내 처세술은 눈보다 빠르니까. “뭐 빼먹은 거 없어?” 자연스럽고 신속하게 화제를 돌린다.   


그나저나 고독이라니. 정말 혼자 남게 되니 이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혼자만 있으면 고독해지는 걸까. 가게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괜히 집에 가기 싫었다. 혼자 있어야만 쌓인 스트레스가 해소될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안 좋은 기분을 아내한테 옮기고 싶지 않았다. 그때마다 근처 공원에서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다 집에 돌아왔다(허락 받은 외출이다). 물리적으로는 고독을 여러 번 겪은 셈. 근데 홀로 있는 게 해결책이었다면, 나는 왜 번아웃에 빠졌을까.   


자기 전에 누워있는데 문득 소설가 김연수가 고독에 대해 말한 게 떠올랐다. 그는 몽골 초원에서 수많은 별을 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독이란 “나는 영원히 살 수 없는데 이 우주는 영원히 반짝일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의 감정”이라 표현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혼자 있는 것과 고독은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된다. 흔히 말하는 외로움과는 다르다는 얘기다. 틱낫한 스님은 고독을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일이라 말했다. 자기 자신을 대면하는 일이란 뭘까. 그것은 있는 그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다.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넓은 세상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았을 때, 비로소 인간은 고독해진다.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대학시절 문학 교양수업 과제로 서울 합정동 절두산 공원을 찾은 적이 있었다. 김훈의 소설 <흑산>이 막 출간된 때라 천주교 성지에 대한 답사기를 리포트로 제출할 생각이었다. 절두산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강가에 박혀 있는 큰 바위였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약 8,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됐다. 누에 대가리 같다고 붙여진 잠두봉(蠶頭峰)이라는 지명이 절두산(切頭山)으로 바뀐 것도 그 무렵이다.


그들이 처형 직전에 흐르던 강을 내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세계란 본디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죽어가도 이 강은 그저 지켜보기만 했을 것이다. 그 무심한 세계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 앞에 나는 하찮고 작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자신과 온전히 마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말대로라면 내가 느낀 것은 분명 고독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나는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시간이 흘러 전공 수업에서 키에르 케고르가 했다는 “절대 자유는 절대 타락”이라는 말을 접했을 때, 나는 그때 느낀 해방감이 자유였음을 알았다. 여기서 키에르 케고르의 '절대 자유'는 타자가 없는 세계를 뜻한다. 이 세상에 나만 있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는 '너'를 통해서만 입증된다. 자유란 존재하는 개인의 의지를 권리로서 포괄하는 개념이다. 혼자라면 이를 ‘자유’로 표현할 이유가 없다. 해서 ‘너‘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자유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도 자유도 무언가, 또는 누군가의 저항을 전제로 한다. 결국 고독과 자유는 한 몸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르시시스트는 고독도, 자유도 느끼지 못한다. 나르시시스트란 자기애가 과한 사람이 아니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자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세계란 그저 자신의 연장이다. 그들은 중력이 없는 세계에 있는 것과 같다. 타자가 없는 세계에서 의식의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지쳐간다. 지친 몸이 포도당을 갈구하듯, 그들은 더 많은 주목과 존경, 자기애를 필요로 한다.      


그 존경을 체감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공간은 SNS다. SNS 속 세계에서는 비대해진 자아의 욕망을 충족하는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다. 내 기호에 맞게 세계를 바라보는 게 가능하다. 거슬리는 계정은 차단하면 그만이고, ‘좋아요’를 누르면 알고리즘이 알아서 입맛에 맞는 피드를 골라준다. 세계를 향한 인식이 온전히 자신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친구’로 연결된 개개인은 오직 피드와 댓글로서만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좋아요'의 세계를 구축한다. 이곳에서 진실이란 오직 '좋아요'의 숫자로서 입증된다. 고독은 서서히 말살된다.


왜곡된 자기애를 독려하는 세상에서도 고독을 찾는 사람들은 분명 있다. 얼마 전에 본 MBC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시즌3>에서의 기안 84가 그랬다. 기안84와 빠니보틀, 덱스가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나무 군락지를 찾아간 에피소드였다. 나도 그때 바오밥 나무가 자세히 나오는 영상 콘텐츠를 처음 봤다. 생각 이상으로 바오밥나무는 거대했다. 기본 수령이 무려 3천 년이란다. 나무를 배경으로 신나게 사진을 찍던 기안 84는 문득 상념에 잠긴다. “이 바오밥나무에게 인간은 무엇으로 느껴질까?” “미물처럼 느껴질 거 아니에요” “짧구나, 인생이라는 것이”


나는 그의 말과 표정에서 고독을 읽었다. 기안84는 여행 내내 자신을 세계와 대면시킨다. 바람대로 되지 않는 세계의 험난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렇다. 고독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나르시시즘과 맞서 싸울 힘을 준다. 이걸 깨닫기 위해 다들 여행을 떠나는 걸까. 물론 여행을 간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행이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행은 언감생심인 나는 어디를 가야 고독을 경험할 수 있을까? 남산타워? 절두산 공원? 매봉산? 우리 집 뒷산? 어디를 갈까 지도를 켜고 여기저기 찾아보는데 김연수가 쓴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 나온 구절이 생각났다. "요즘 세상에는 값싸게 즐길 수 있는 고독이란 게 없어." 그의 말대로 고독의 값은 점점 비싸지고 있다. 그렇다고 이대로 보고만 있을 것인가! 모래사장에서 동전을 찾는 심정으로 어디든 나서보기로 마음먹었다. 고독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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