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로 Apr 18. 2024

시간관념에서 자유로워 본 적 있나요?

식당은 초단위로 일이 처리되는 곳이다. 30초간 면을 익히고, 3분 30초 동안 돈가스가 익으면 20초 간 레스팅을 한 후 썰어서 낸다. 재료가 익는 3분 30초 동안 접시에 양배추와 밥을 퍼 담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음식은 늦어도 3분 안에 손님에게 제공돼야 한다. 4분이 지나면 면은 붇기 시작하고 튀김의 수분이 날아가며, 미지근하게 식어간다. 이런 ‘참사’를 막으려면 모든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돼야 한다. 한 공정이라도 어그러지면 가게는 난리가 난다.          


그런 의미에서 식당 역시 공장이다. 정해진 시간에 얼마나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느냐의 싸움이다. 차이가 있다면 1인 1 공정이 아니라 1인 다공정이라는 것 정도다. 다공정 체제의 공장을 문제없이 돌리려면 머무는 자리에서 최대한 많은 일을 해내야 한다. 농구의 피벗처럼 발 하나를 축으로 쓰면서 앉았다 일어났다 뒤로 돌았다 하며 요리를 만든다. 튀김기에 돈가스를 집어넣으면, 바로 옆 면탕기에서 메밀 면을 건져내고, 그걸 그릇에 담아낸 뒤 메밀국수에 들어가는 쯔유를 부어내 내놓는다. 쓰던 양념통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까지 한 자리에서 해결한다. 식당에서의 시간은 늘 해야 할 일로 빽빽하다.


10년을 이런 환경에서 일하다 보니 일상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정해진 시간에 최대한 많은 일들을 끼워 넣으려 한다. 지난주가 특히 그랬다. 식기세척기에 그릇들을 넣고 돌린 뒤 바로 옆에 둔 쓰레기통을 비우고, 가스레인지 청소를 시작했다. 그다음부터 거실 바닥처럼 면적이 큰 곳부터 청소기를 돌렸다. 바닥 청소가 끝나자마자 식기세척기가 잘 돌아가는지 확인한 뒤 집을 나섰다. 예약한 치과에서 스케일링을 받고 나와서는 바로 옆에 마트에서 야채를 샀다. 그리고 집에 와 바로 화장실을 마저 청소했다. 파스타로 저녁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한 뒤 피트니스 클럽에서 운동을 하고 나니 하루가 다 지나 있었다. 돌이켜보니 치과 대기시간 말고는 앉아서 쉰 적이 전혀 없었다.          


누군가는 부지런하다, 생산적이다라고 얘기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쉽게 말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효율성에는 가속이 붙는다. 추구할수록 더 치밀해지고 빡빡해진다. 게다가 약간의 쾌감까지 선사한다. 직장에서든 일상에서든 브레이크를 걸어주지 않으면 끝을 모르고 폭주한다. 흔히 말하는 ‘쪼는 맛’에 길들여진 탓이다. 밀린 리포트를 마감 시간 10분 전에 완성해서 제출했을 때의 느낌 같달까. 뒤에서 누가 잔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건만, 도무지 멈추지 못하겠다. 메모장이 시간대마다 해야 할 일로 가득 찬다. 이따금 밀린 일을 해치우는 게 아니라 매 순간 이렇게 살고 있다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삶이 공장화됐다는 신호기 때문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서 근대 사회가 생산 공정의 표준화, 전문화, 집중화, 극대화, 동시화를 추구하면서 발전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모두 대량 생산 공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들이다. 실제로 당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정해진 시간에 역량을 집중해 생산성을 끌어내고 싶어 했다. 더불어 이를 양적으로 측정 가능하게 만들고자 했다. 24시간 체제의 표준화와 시계의 보급이 그들의 소원을 이뤄줬다. 특히 시계의 보급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시간을 최대한 세밀하게 분류하고, 일상이 효과적인 공정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강제했다. 시계가 도입된 공장의 노동자들은 진자시계의 종소리에 맞춰 60분 동안 나사를 조이고, 30분 동안 밥을 먹는다. 10분 휴식 뒤 다시 60분 간 망치질을 한다. 그렇게 자본가들은 각 공정마다 시간당 생산량을 측정하는 게 가능해졌다. 개별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생산을 독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세기 말엽에 접어들면서 24시간 체제와 시계는 전 세계 모든 이의 일상에 침투한다. 전국의 어린이들이 모두 같은 시각에 등교해 수업을 듣고, 노동자들은 정오에 점심을 먹으며, 열강들은 다음 날 0시 00시를 기해 적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현재에도 우리는 당시의 시간개념을 토대로 살아간다. 그것이 삶의 편의성과 산업 생산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24시간 체제는 윈도우나 맥 같은 운영체계와 같다. 시계는 이를 표현하는 단말기다. 이 단말기는 손목시계와 회중시계로 소형화되면서 개개인의 소지품으로 자리 잡는다. 돌이켜보면 스마트폰의 보급과 시계의 보급은 닮은 점이 많다. 공적 목적으로 탄생한 기계들이 소형화돼 개인의 소지품이 되었고, 그것들이 이내 우리의 삶을 잠식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시계를 제일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통해 시계는 삶을 오직 노동과 휴식으로만 구분한다고 지적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과거의 유럽은 달력을 통해 세상을 이해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력은 과거의 사건을 되새기는 기능을 한다. 사람들은 달력을 보며 성 프란체스코의 축일, 혁명 기념일, 성탄절, 나와 내 가족이 탄생한 날들을 되새겼다. 시계가 보급되며 사람들은 날짜보다 흘러가는 시간 그 자체에 더 집착하게 됐다. 사람들은 이제 날짜가 아닌 시간을 센다. 시계는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실시간으로 표현할 뿐이다. 시계엔 가족들과의 추억, 사랑하는 사람과 나눈 순간, 영적 고양을 위한 안식이 담겨있지 않다. 그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주어진 시간에 얼마만큼 일을 했으며 쉬었는지를 따질 뿐이다.         

 

이런 이유로 19세기 노동자들에게 시계는 억압의 상징이었다. 파리코뮌* 당시 혁명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광장의 시계탑을 파괴한 건 그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자들의 삶이 시계에 의해 어떻게 통제되는지 온갖 끔찍한 예들을 제시한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도 시계는 억압의 도구다. 주인공은 시계가 조종하는 꼭두각시다. 주인공은 정오를 가리키는 종이 울리면 최면에 걸린 듯 점심을 먹는다. 다시 종이 울리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어나 작업을 재개한다.


과거의 시계는 채찍과 같았다. 자본가들은 진자시계의 종소리를 이용해 지친 노동자들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지금 시대에는 각자의 스마트폰 알람이 그 역할을 한다. 회사에 지각하면, 학교에 지각하면 우리는 도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지금 시대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건 억압이 아닌 도태의 두려움이다. 과거에 자행된 착취와 구속이 현재에는 ‘무한 경쟁’과 ‘자기 계발’의 논리로 이뤄지고 있다. 그렇게 각자는 하루를 양적으로 환산할 수 있는 일과들로 가득 채운다. ‘갓생’*은 극도로 쪼갠 시간관념에 길들여진 일상이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선 때로 시간제한 없는 여유가 필요하다. 치밀하게 짜인 24시간은 이를 방해한다. 정해진 시간이 다가올수록 불안함은 커지고 몰입도는 낮아진다. 그 결과 멍 때리기나 사색 등의 행위는 삶에 스며들지 못한다. 이런 삶을 지속할수록 번아웃은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나중에는 스스로 번아웃을 인지하면서도 쉽게 멈추지 못한다. 과거의 자본가들은 매출이 줄어들 때보다 파업으로 공장이 멈추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모두가 자기 경영을 하는 시대다. '나'라는 공장을 멈춰 세우는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고 보니 정말 온 곳에 시계다. 시계를 보며 일어나 시계를 보며 일하고 시계를 보며 잠든다. 돌이켜보니 무엇을 하든 시계를 보는 습관이 되어 있더라. 내가 번아웃 진단을 받은 데에는 수시로 시계를 보는 습관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줬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개인적으로 시도해보고 있는 것은 ‘시계 덜 보기’다. 핸드폰이 시계의 역할도 하는지라, 시계를 덜 본다는 건 결국 핸드폰에서 조금 더 멀어진다는 의미기도 하다. 윈도우 시스템 트레이에 표시된 시계도 보이지 않게 설정했다. 휴일만이라도 기존의 시간관념을 한층 흐릿하게 바꿔 볼 생각이다. 여유가 된다면 하루고 이틀이고 스스로에게 기약 없는 시간을 부여하고 싶다. 더 자주. 더 많이. 삶에서 정말 소중한 순간들은 투입 대비 산출로 치환되지 않으니까.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약 70일 가량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났던 노동자 혁명.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 갓생: 신을 의미하는 '갓(god)'과 삶을 의미하는 '생(生)'을 조합한 신조어. 매일 생산적인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부지런하게 사는 인생을 일컫는다.

이전 06화 고독을 느껴본 적 있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